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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씨 인터뷰 (11.8)

자료/자료_형제복지원 사건

by 미메시스TV 2013. 11. 10.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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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선씨는 잘 웃었다. 형제복지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웃었고, 사진 촬영을 하면서도 웃었다. “마음이 아프다고 오만상을 써가면서 이야기하면 아무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 얘기 잘 믿어주지도 않을 테니, 이왕 얘기하는 거 듣고 싶게, 재미있게 하자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한씨 속에 있는 상처투성이의 여덟살 꼬마는 간절하게 말한다. ‘들어주세요, 우리 얘기 들어주세요, 어두운 곳에 갇혀 있는 우리를 봐주세요.’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토요판/커버스토리]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씨 인터뷰

형제복지원 사건 생존자 한종선
26년만에 국가의 책임을 묻는다

▶ 한종선씨는 올해 대전, 부산, 전라도 등 전국을 다녔습니다. 언론을 통해 형제복지원 사건을 듣고 연락 온 피해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날 때마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 있구나. 나 혼자만 살아남은 게 아니구나’ 싶어서요. 그는 오늘도 대책위(02-794-0395)에서 피해자들을 기다립니다. 작은 후원으로도 대책위를 도울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752602-04-194222/여준민·형제복지원)

‘너무 오래된 사건을 가지고 나와 죄송합니다.’

2012년 5월께 한종선(37)씨는 직접 쓴 손팻말을 들고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섰다. 25년 전 자신이 겪은 부산 형제복지원 인권침해의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 전부터 국가인권위원회, 언론사, 인권단체 등의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오는 말은 ‘공소시효가 끝났다’였다. 고민하던 한씨는 결국 스스로 말하기 시작했다.

형제복지원은 1987년 당시 3164명을 수용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아 시설이었다. 불법감금·폭행·강제노역 등 인권침해로 그때까지 12년간 51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건 원장이었던 박인근씨가 불법감금과 국가보조금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1987년 1월. 그러나 비슷한 시기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달리, 반짝 주목받고 사라졌다. 경찰과 검찰은 형제복지원 인권침해를 수사하지 않았고, 법원은 박 원장의 형량을 계속 줄여줬다. 같은 해 6월30일 복지원 폐쇄로 뿔뿔이 흩어진 피해자들은 ‘부랑자’라는 낙인과 공포의 기억 속에 입을 닫았다.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씨가 다시 말하기 전까지 아무도 이 사건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작은누나는 형제복지원에서 병을 얻어 지금까지 정신병원에 있다. 자신은 세번 감옥살이를 했다. 그 뒤 일하다 허리를 다쳐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가족의 불행을 아버지와 운명 탓으로 돌렸던 그는 이제 그 책임을 형제복지원과 국가에 묻고 있다.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지난달 27일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이 사건과 관련한 첫 대책위다. “26년 전 사건을 왜 이제 다시 말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한씨는 반문한다. “왜 26년이나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느냐”고.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8살 때인 1984년 10월16일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다. 그전에는 어떻게 살았나?

“아버지와 큰누나, 작은누나 넷이서 부산에서 살았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없다. 아버지는 구두를 닦았다. 집 근처에 부산역, 용두산공원, 영도다리, 자갈치시장이 있었다. 학교 끝나면 작은누나랑 만날 놀러 갔다. 누나는 꽃반지 만들고 나는 지렁이 잡고…. 유일하게 내게 남은 따뜻한 추억이다.”

-형제복지원에 어떻게 갔나?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간식과 옷을 사주고 이소룡이 나오는 영화도 보여줬다. 웬일인가 싶어 마냥 좋아했다. 그러고는 나와 작은누나를 파출소로 데려가서 기다리라고 하고 나갔는데, 웬 검은색 지프 같은 차가 와서 우리를 실어 갔다.”

톰 크루즈가 말했다, 꿈만 꾸면 계속 인질이 된다고

형제복지원의 뿌리는 박인근(83) 원장이 1960년 설립한 ‘형제육아원’이다. 1979년 법인 명칭을 바꾼 뒤, 전국 최대 부랑아 시설로 성장했다. 그 배경에는 박정희 정권의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 지침’인 1975년 12월15일자 내무부 훈령 410호와 복지국가 건설, 사회정의 구현을 내세운 전두환 정권의 ‘부랑인 정화 사업’이 있었다. 전자에 따라 경찰과 지방자치단체가 합동으로 부랑인 단속·강제 구금을 시작했고, 후자는 이를 더 강화시켰다.

도시 미관, 범죄 예방이란 명목으로 부랑인들은 국가권력에 의해 각종 시설에 강제 수용됐다. 1987년 2월4일 발표된 ‘신민당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1986년 형제복지원 수용자 3975명 중 경찰이 수용 의뢰한 사람이 3117명이었다. 당시 경찰 내부 근무 평점이 구류자 1명당 2~3점이지만 형제원 입소는 1명당 5점이었던 시절이었다. 밖에서 놀고 있다가, 퇴근하다가, 차가 끊겨서 부산역 대합실에 있다가, 가출했다가 다짜고짜 잡혀온 피해자들의 증언이 잇따랐다.

한종선씨(가운데)의 아버지(왼쪽)와 작은누나는 경북 구미의 한 정신병원에 있다. 엄마처럼 한씨를 돌봤던 작은누나는 ‘내 동생은 여덟살인데’ 하며 한씨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 세 사람이 가족이란 사실을 아는 건 한씨뿐이다. 올해 병원에서 찍은 이 사진이 그가 가진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한종선씨 제공

내내 구타와 기합의 기억…12년간 사망자 513명

-이상한 느낌이 들었나?

“차에 태우려고 하니까 작은누나(당시 11살)가 ‘집에 갈 거다’라며 울었고 나도 덩달아 울다가 맞았다. 충격에 정신 줄을 놓은 채 주위를 둘러보니 나와 비슷한 아이들이 있었다. 복지원에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었는데, 옷을 팬티까지 다 벗으라더니 신체검사를 했다.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는데, 우리를 불러 소대로 데려갔다.”

형제복지원은 군대식 조직이었다. 수용자들은 1~28소대에 분산 수용돼 집단생활을 했다. 소대마다 소대장 1명, 총무 1명, 조장 4명씩이 있었는데 모두 수용자들이었다. 수용자는 모두 군인처럼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파란색 추리닝을 입고 지냈다. 아이들도 예외는 없었다. 3164명 중 1~18살의 아동은 915명이었고, 아동소대도 따로 있었다.

-소대로 가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누나와 같이 있어 위안이 됐는데, 누나는 23소대로 나는 24소대로 찢어졌다. 무서웠다. 그때까지 누나가 계속 옆에서 엄마처럼 지켜줬는데….”

-그곳의 일상은?

“매일 새벽 4시에 불침번이 ‘기상’ 하고 침대를 치면 일어난다. 이불 정리하고 4열 종대로 앉아 자체 점호를 한다. 탈출했나 안 했나 확인하는 거다. 점호 뒤 세면장 가서 4열 종대로 앉아 씻는다. 소금 받아 손가락으로 양치질을 하고 조장들이 물 세 바가지 부어주면 그걸로 입 헹구고 얼굴 씻고 바로 튀어나갔다. 10초도 안 걸렸다. 24소대가 많을 때는 123명, 적게는 84명이 있었는데 20~30분 안에 딱 끝난다. 씻고 나서 4열 종대로 있다가 중대장 원생이 오면 또 점호를 받는다. 점호가 끝나면 4시30분인데 아침 식사시간인 6시까지 한 시간 반 정도 운동장에 나가 군가나 찬송가를 부르며 뛴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같은.”

-식사는 어땠나?

“꽁보리밥, 전어젓, 깍두기, ‘똥국’이라고 불렀던 시래기 된장국이 매일 나왔다. 어쩌다 감자 부스러기나 고기는 없는 소고깃국이 나왔다. 조장은 식사시간 때마다 (밥을 빨리 먹는) ‘선착순 몇 명’을 외쳤다. 선착순 숫자는 조장 마음이다. 오늘은 왠지 타작하고 싶다고 하면 선착순 10명, 기분 좋으면 50명 할 때도 있다. 그 안에 안 들면 맞는 거다. 두들겨 맞지 않으려고 밥 세네숟갈 먹고 뛰어나간다. 아침, 점심, 저녁 다 그랬다. 식사시간에 안 맞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복지원에서 언제부터 맞았나?

“이틀째부터 맞았다. 나는 키가 작아 소대에서 1번이었다. 조장이 “번호”라고 말하면 1번이 맨 왼쪽에 서서 “1번”을 외쳐야 다음 사람이 2번, 3번 한다. 그걸 제대로 못해서 맞았다. 그때 나는 한글도 숫자도 잘 몰랐다. 복지원 안에 개금분교가 있었지만, 학교 다닌 기억보다 소대에서 맞은 기억이 더 많다. 한번 ‘줄빳다’ 맞으면 기본 5대씩 맞는다고 치면 된다. 소대 안에 있는 시간 내내 구타와 기합이 반복됐다. 24시간 중 깨어 있는 시간은 항상 맞았다.”

-누가, 왜 그렇게 때렸나?

“소대장이나 조장이 그랬다. 그들도 수용자였다. 자기들이 제대로 안 때리면 일반 소대원으로 강등될까봐 더 심하게 굴었다. 때리는 데 이유가 없다. 기상 1분 늦게 했다고 맞고, 제대로 안 서 있다고 맞고, 기분 나쁘다고 맞고…. 내가 있던 소대 중대장은 어른이었지만 조장은 열세살 정도밖에 안 됐다. 그 어린애들이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공간에서 사람을 마구 때리다 보면 이성을 잃기 십상이었다. 어리든 나이가 많든 상관없이 똑같이 맞았다. 24소대에는 여섯살 애도 있었고, 열살부터 있었던 27소대에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고등학생이 있었다. 이불에 싸서 때리는 이불 말이, 그냥 마구 때리는 타작, 물구나무서는 히로시마, 원산폭격 등 구타와 기합이 수도 없었다. 이성뿐 아니라 동성 간의 성폭행도 만연했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게 뭔지도 모르고 안에서 비일비재하니까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열한살이었던 작은누나와 
여덟살 때 형제복지원에 갔다 
깨어있는 시간 동안 계속 맞았고 
죽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살아남고 싶었다

작은누나는 점점 이상해졌고 
아버지마저 형제복지원에 수용 
1987년 6월 복지원 폐쇄로 
소식 끊긴 아버지·누나를 
20년 만에 정신병원에서 만났다

-그렇게 맞다 죽는 사람도 있었나?

“맞다가 병원에 실려간 뒤 돌아오지 않으면 죽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은 소대 총원에서도 슬그머니 사라진다. 그러나 죽음도 금세 잊을 수밖에 없었다. 복지원 안에서 죽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다음은 내 차례일 수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그래서 배고프면 벌레도 잡아먹고 흙을 쿠키처럼 딱딱하게 말려 먹기도 했다.”

신민당 진상조사단이 형제복지원 내부자료를 분석하니 1975~1986년 사망자가 513명이었다. 그중 한명이 1986년 8월 반항했다며 맞다 숨진 김계원씨다. 형제복지원은 그가 죽자 ‘신경쇠약으로 인한 신부전증’이라는 허위 사망진단서를 발급받고 매장했다. 수용자들은 “사체가 병원에 실험용으로 팔려간다”고 주장했다. 당시 언론은 형제복지원을 사설수용소군도, 아오지 탄광, 살상원이라고 불렀다.

지렁이가 꿈틀대지 않는 경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누나를 보는 게 제일 힘들었다. 누나는 만날 나를 보러 소대를 이탈했다가 두들겨 맞았다. 같은 소대에 있던 누나들 말로는 말 안 듣는다고 많이 맞고 성적 학대도 있었다고 했다. 누나는 점점 이상해졌다. ‘시간또라이’라는 정신분열 환자가 돼 정신이상자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손이 묶인 채 항상 누워 있었다.”

-저항하거나 도망치고 싶지 않았나?

“지렁이가 밟으면 왜 꿈틀대는지 아나? 확실하게 안 밟아서 그렇다. 완전히 죽을 정도로 확 밟으면 꿈틀댈 힘도 없다. 복지원에서의 폭력이 그랬다. 꿈틀댈 수 없을 정도로 밟아댔기 때문에 감히 덤빌 수가 없었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망갔다 잡혀오는 사람들이 반신불수 되는 걸 보고 꿈도 못 꿨다. 신고? 안에 갇혀 있는데 어떻게 하나. 유일한 희망은 아버지가 찾아와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왜 데리러 오지 않았나?

“아버지가 1986년 복지원에 왔다. ‘우리 데리고 나가려고 온 거야?’라고 들뜬 마음으로 물었는데 잡혀왔다고 하더라.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는데 도리어 잡혀 들어온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우리 가족을 박살낸 아버지를 다시 만나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한이 생겼다. 그렇게 복지원에서 마지막으로 본 뒤 아버지가 ‘좀 이상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용원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 검사(현 법무법인 한별 대표변호사)는 우연히 형제복지원의 강제노역 현장을 목격하고 수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은 거물이었다. 그는 1981년 4월 국민포장, 1985년 5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데다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이었다. 예상대로 수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박 원장 구속 다음날 부산시장이 ‘빨리 석방해야 한다’고 전화를 했다. 복지원 수용자 전원을 대상으로 구타 등 가혹행위, 강제노역 여부 등을 조사하러 울산 경찰관 30명을 보냈지만 부산지검 차장검사의 지시로 철수했다. 수사를 못하게 하니 내가 밝혀낼 수 있던 건 정부 보조금 횡령이었다. 그렇게 85~86년에 박 원장이 횡령한 11억4254만원을 찾아냈지만, 이마저도 검찰 상부의 지시로 6억8178만원으로 축소해야 했다.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데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형제복지원 사건이 동시에 터져 부담을 느꼈던 전두환 정권 차원에서 이 사건을 묻으려 했었다.” 김 변호사가 말했다.

그는 업무상 횡령, 특수 감금 등을 적용해 박인근 원장 등에게 징역 15년, 벌금 6억8178만원을 구형했다. 당시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원은 불법 감금 등을 인정하고, 징역 10년에 벌금 6억8178만원을 선고했다. 형량과 혐의는 계속 줄어들었다. 대구고등법원은 징역 4년, 벌금 없음을 선고했고 대법원은 이보다 낮은 2년6개월형을 확정했다. 게다가 대법원은 “법령에 근거한 정당한 직무수행”이라며 특수 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대법관 중의 한명이 헌법재판소 소장을 지낸 김용준 전 국무총리 후보자다.

2년간의 수사와 재판이 형제복지원의 실체를 밝히지 못한 사이, 1987년 6월30일 형제복지원은 폐쇄됐다. 수용자들은 무방비 상태로 사회로 나가거나 또 다른 시설로 옮겨가야 했다.

아들·동생 못 알아보는 아버지와 누나

-1987년 당시 안의 분위기는?

“경찰차가 왔다갔다하고 폐쇄된다는 소문이 드니까 ‘드디어 풀려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녀님들이 와서 내 이름을 부르더니 버스에 타라고 했다. ‘아버지랑 누나도 여기 있다’고 했는데 일단 타라고 했다. 그렇게 두 사람과 연락이 끊겼다. 버스를 타고 간 곳은 서울에 있는 ‘소년의 집’이었다. 밥도 배부르게 먹고 맞지도 않는 그곳은 천국이었다. 그런데도 스무번이 넘게 아버지와 누나를 찾겠다며 도망을 쳤다.”

-소년의 집에 언제까지 있었나?

“1992년쯤 나왔다. 열여섯살이 됐는데도 초등학교 졸업을 못하고 있으니 수녀님이 취업해서 아버지를 찾으라고 했다. 그래서 자격증 따고 경기도 성남에 있는 공장에 취업했다.”

-사회생활은 어땠나?

“소년의 집에서 같이 취업했던 애가 차털이하다 걸려 도망을 쳤다. 사장이 그때부터 ‘거기서 나온 애들은 다 똑같은 도둑놈’이라며 색안경을 끼고 손찌검을 했다. 마침 아는 형이 서울에 있는 구두공장을 소개해줘 그곳으로 옮겼다. 월급 35만원을 받고, 그중 30만원을 사장님 이름으로 된 통장에 넣었다. 그러다 1997년 외환위기 터지기 전에 가족을 찾으러 간다고 사장에게 그동안 모은 돈을 달라고 하니 ‘네 돈이 어딨어? 자꾸 여기서 이러면 파출소에 신고해서 복지원 같은 곳에 처넣으라고 한다’고 했다. 10만원 받고 나와서 빈 창고나 옥상에서 지내다가 돈 떨어질 때쯤 동네 불량배들을 알게 됐다. 불량배 생활을 하다 절도한 것 때문에 8개월, 1년, 1년6개월 세번 감옥에 갔다.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었지만 복지시설에 있다 갑자기 사회에 나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몰랐고, 사회도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원망이 컸을 것 같다.

“그래도 어긋나지 않고 정신 차린 건 네살 많은 큰누나 덕분이었다. 어렸을 때 친척집으로 간 큰누나를 1998년 다시 만났다. 큰누나가 세번째 감옥 갔을 때 면회를 왔는데 말도 없이 실망한 눈빛으로 나를 보기만 하더라. 그 눈빛을 보니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싶었다. 그때부터 ‘왜 내 인생은 이렇게 더럽게 꼬였을까? 우리 가족은 왜 이렇게 됐을까?’ 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운명 탓인가 싶어 관상학 공부도 했다. 그러다가 ‘형제복지원만 안 들어갔어도’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02년 출소 뒤에 어떻게 지냈나?

“닥치는 대로 일했다. 짜장면, 한식 배달도 하고 전단도 뿌리고, 봉투 공장에서도 일하고, 막노동도 뛰었다. 초등학교도 졸업 못했으니 이력서 내라는 곳에 취업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2007년쯤 미군 숙소 공사 현장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쳐 추간판탈출증 진단을 받았다. 산업재해 신청을 하려 했는데 근로복지공단 자문의사 소견은 산재가 아니라고 했다. 다른 병원 찾아다니며 진단서 떼다 돈이 떨어져 신청을 접었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아 인터넷 신문고에 글을 올렸더니, 전화가 와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라고 하더라. 그래서 주민센터에 신청하러 갔다 이미 기초생활수급자였던 아버지와 작은누나를 찾게 되었다.”

-1987년 헤어진 뒤 처음 만나는 건가?

“그렇다. 아버지는 울산, 작은누나는 부산에 있었다. 어렸을 때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정상적으로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다. 찾아가보니 정신병원이더라. 아버지와 누나는 복지원 폐쇄 뒤 노숙자가 돼 부산 시내를 떠돌다가 1989년부터 정신병원에 있었다고 했다.”

-20년 만에 봤는데 한번에 알아봤나?

“30대 후반의 건장한 아버지는 없고, 삐쩍 마르고 이빨도 한개밖에 없는 할아버지가 있더라. 그 모습을 보니 원망이 한순간에 훅 가라앉아 버렸다. 아버지는 ‘내 아들은 여덟살인데’ 하면서 나를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찰이 복지원에 아버지를 보냈던 것처럼, 또 자신을 어디론가 데려가려는 국가기관에서 보낸 감시자라고 생각한다. 배우 신은경을 닮았다고 생각했던 작은누나도 뚱뚱한 아줌마가 됐다. 누나는 못 알아볼 정도라, 만나자마자 발등의 화상부터 확인했다. 어렸을 때 내가 먹고 싶다던 ‘쪽자’(달고나)를 만들다 국자를 떨어뜨려 생긴 화상이었다. 누나도 어른이 된 나를 못 알아본다. ‘내 동생 선이’라고 했다가 오빠, 삼촌, 아저씨라고 했다가…. 두 사람도 서로 못 알아본다. 아버지와 누나의 시간은 오래전에 멈춰 있었다.”

“닥치는 대로 다 죽여버릴까 생각하기도”

-가족을 찾은 뒤 변화가 있었나?

“형제복지원 사건이 해결돼야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커졌다. 그간 틈틈이 복지원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박인근 원장은 겨우 2년6개월형 마치고 나와 또 복지시설 운영하며 돈도 많이 벌었다. 나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돼 전전긍긍하며 사는데 저 인간은 잘살더라. 너무 화가 났다. 사이코패스가 이렇게 생기는구나. 닥치는 대로 다 죽여버릴까 생각할 때도 있었다.”

박인근 원장은 1989년 7월20일 출소 뒤 다음해 부산시 북구청에서 중증장애인 시설 신축사업비를 받았다. 형제복지원은 폐쇄됐지만 법인 명의는 남아 재육원, 욥의 마을, 형제복지지원재단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현재 법인 기본재산 221억원의 형제복지지원재단은 2년 전부터 박 원장의 셋째 아들이 운영하고 있다. 이 재단은 지난해 유명세를 탔다. 부산시가 재단을 감사한 뒤 횡령이나 유용으로 의심되는 43억여원에 대해 검찰에 수사의뢰했기 때문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재단의 입장을 듣기 위해 연락을 취했으나 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선택을 했나?

“‘억’ 소리라도 한번 질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뿐 방법을 몰랐다. 그러다 지난해 5월쯤 텔레비전에서 <콜래트럴>이란 영화를 봤다. 암살자 톰 크루즈가 인질로 잡은 택시기사에게 꿈이 뭐였는지를 물었다. ‘리무진 택시 회사를 차리는 것’이라고 하니 톰이 ‘당신은 꿈만 꿨기 때문에 인질이 된 거야. 꿈을 이루려면 빚을 내서라도 리무진 택시를 구입했어야 했다’고 말하더라. 그 말을 듣고 ‘고민만 해서는 안 되겠구나’ 싶어 다음날부터 국회 앞에서 노숙하며 1인시위를 했다.”

-국회 앞에서 1인시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주목받긴 어렵다.

“내가 쓴 손팻말을 읽어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다 여름쯤인가 어떤 사람이 와서 손팻말을 읽더라. 내 얘길 듣더니 ‘1인시위는 오래 못 간다’며 ‘무기가 필요하다. 기억나는 대로 글을 써봐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하고만 살아서 믿음이 안 갔다. 교수이며 어디 대표라고 하는데 그렇게 보이지도 않았고. 그 사람은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였다. 교수님 보내고 저녁에 곰곰이 생각했다. 1인시위 해도 아무도 안 봐주니 적대감만 생기는데 글이라도 써보자 싶어 그날로 짐을 싸 집으로 돌아갔다.”

한종선씨의 수기에 전규찬 교수와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의 글이 보태져 2012년 11월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이 나왔다. 한씨의 이야기가 알려지자 탈시설정책위원회와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등을 중심으로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기 시작했다. 올해 1월31일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대책위 준비모임을 꾸려 피해자 찾기, 국가기록원 등을 통한 자료조사, 학술토론회 등의 활동을 진행했다. 그 결실이 지난달 20여개 시민단체가 모여 출범한 대책위다.

-대책위 출범까지 왜 26년이 걸렸을까?

“아무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대법관이 국무총리 후보가 될 만큼 관련자들이 아직도 건재하니 쉬쉬 됐던 거다. 인권단체들은 지금 막 터지는 사건을 막느라 이를 살펴볼 시간이 없었다. 피해자들은 말했다간 또 잡혀갈까 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까 봐, 다른 시설에 지금도 갇혀 있어서 나설 수 없었다. 편견도 컸다. 부랑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데려간다고 하니까 좋게만 생각했다.”

내 인생은 왜 꼬였을까 
우리 가족은 왜 이렇게 됐을까 
운명 탓하다가 그는 생각했다 
‘형제복지원에만 안 들어갔어도…’

영화 <콜래트럴>에서 암살자인 
톰 크루즈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꿈을 이루려면 빚을 내서라도 
리무진 택시를 구입했어야 했어” 
다음날 당장 국회 앞으로 갔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최종적으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데 우리 같은 약자를 시설에 강제로 데려가 가뒀다. 정부가 허가해주고 예산도 줬으면 시설이 제대로 운영되는지 관리·감독해야 했는데 그것도 안 하고 방치했다. 복지사회를 구현한다면서 우리를 인간이 아니라 배부른 개돼지처럼 대했다. 우리는 그 안에 갇혔지만 배고픈 인간이고 싶었는데, 상명하복 명령체계에서 말 안 들으면 개돼지처럼 때리게 뒀다.”

제발 이제는 내 가족을 돌려다오

대책위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박인근이라는 개인에 의한 범죄가 아닌 반헌법적인 국가정책에 의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범죄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강경선 대책위 공동대표(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는 “형제복지원은 정부가 운영비를 지원한 국가 위탁 시설이었다. 수용자를 데려다 준 것도 경찰이나 지방자치단체 등 국가기관이었다. 부산시는 감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며 비리를 눈감아줬다. 검사의 수사를 막은 것도, 최종 판결을 내린 것도 국가다. 따라서 형제복지원은 국가 범죄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시각에서 대책위는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국가의 배상책임, 피해자 의료비 지원 등의 내용을 담은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조사 및 피해자 배상에 관한 법률’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피해자 찾기, 학술대회, 자체 진상조사 등의 활동도 벌이고 있다.

인터뷰 중에 한씨는 반가운 문자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고3 시절에 강제 입소되어 1년여를 복지원에서 생활하다 그 당시 유일하게 탈출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뜻깊은 일을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한씨는 피해자모임 대표로서 대책위 활동을 하며 피해자를 찾고 있다. 지금까지 40명의 피해자와 3명의 실종자 가족과 연락이 닿았다.

-만나본 피해자들은 어떻게 지내나?

“안정된 삶을 사는 사람은 2~3명 정도다. 연락이 오면 찾아가서 만난다. 대책위 활동 소개하고 같이 하자고 하는데 대부분 걱정부터 한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을 또 빼앗길까 봐 여전히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그럼 ‘지켜봐 달라.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하고 헤어진다. 그때 기억이 너무 생생하게 떠올라서 괴롭다면서 밤에 술 마시다가 전화하는 사람도 있다.”

-증언하고 활동하면서 전보다 나아졌나?

“과거를 다시 떠올리는 걸 견디는 것에 익숙한 것뿐이지 치유 안 된다. 이야기한다고 치유될 것 같으면 세상에 아픈 사람 없다. 내 상처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어야만 나을 수 있다.”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형제복지원 사건 뒤 10년 지나 양지마을 사건(1998년), 또 10여년 지나 ‘도가니’(2006년 광주 인화학교 사건)가 터졌다. 형제복지원 사건 터지고 26년이 흘렀지만 변한 게 없다. 똑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다시는 우리 같은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복지시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을 해결하는 게 잘못 끼워진 단추를 처음부터 똑바로 맞춰 나가는 길이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가족을 이제라도 돌려줬으면 좋겠다. 병원에서는 이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 어차피 나을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셋이 같이 남의 눈치 안 보고 살 수 있게끔 시골에 빈집이라도 임대해주고 생활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한겨레 : http://www.hani.co.kr/arti/SERIES/381/6104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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