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명단 작성에 꼬박 1년”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 조사팀장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 펴내
희생자 1만4343명 시군별로 수록
진실위 보고서보다 4천여명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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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달간 20만명 학살한 이승만, 친일파 처형은 0명"

[인터뷰②] <전쟁범죄> 펴낸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장




☞ 인터뷰 1편에서 이어집니다.

- 한국전쟁기 민간인들에 대해 일부 미군들이 저지른 행위는 '전쟁범죄'로 볼 수 있는가?
"'전쟁범죄'는 가해자 의도를 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폭격의 경우 가해자 의도를 피하기 위해 '부수적 피해'라는 용어가 개발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용어는 '아무나 죽어라' 하는 식이 될 수밖에 없는 '폭격'이나 '적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피난민간인을 살해하는 '토벌작전'을 합리화한다. 그러다 보니 이 자체가 전쟁범죄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한 번의 우발적인 사건이어도 문제가 있지만 학살이 반복되었다면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부수적 피해'와 '전쟁범죄'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민간인을 적으로 여기고 공격한 행위는 충분히 입증된다. 1950년 7월 26일 미 지상군이 자신들이 소개시킨 피난민임을 알면서도 공격했던 영동 노근리 사건은 이미 전 클린턴 대통령이 사과 비슷한 '유감' 표명을 했다.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사건이 1950년 7월 10일 연기군 서면 월하리에서 있었으며, 8월 12일에는 창원(마산)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씨 재실에서 피난하던 주민 86명이 미군에게 살해당했다. 기록을 보면 미군들은 희생자들이 모두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민군 점령 지역의 민간인이나 민간시설을 공격한 행위도 많았는데, 이를 전선의 이동과 비교해 보면 국민보도연맹사건과 미군폭격사건이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을 미군 항공기가 감시하는 모습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 한국전쟁 중 남쪽 민간인들이 입은 피해는 불가피한 '부수적 피해가'가 아니라 민간인학살이 이승만정권의 '주대상'이었다고 볼 수 있나? 
"전쟁기의 민간인피해를 대개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표현한다. 전쟁은 군인들 사이의 목숨을 건 경쟁이라고 보기 때문에 민간인들의 생명과 무관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이는 전쟁의 참상을 숨기기 위한 완곡어법에 지나지 않는다. 십자군전쟁 등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옛 전쟁에도 점령지역의 민간인을 몰살시키는 사례가 예외 없이 벌어졌다. 이는 오늘날의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나는 국방부의 <한국전쟁사1권> 39쪽에서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를 각각 사망, 부상, 실종으로 구분한 통계를 보고 놀랐다. 군인 경우 사망 22만 8천 명, 부상 71만 7천 명, 실종 4만 4천 명이고, 민간인의 경우 사망 37만 4천명, 부상 23만 명, 실종 38만 8천명이었다.

실종자를 모두 사망으로 볼 수 없겠지만 민간인학살 희생자 대부분이 실종처리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고 일단 사망자와 실종자 수를 합해 부상자 수와 비교해 보았다. 군인의 경우 사망실종자에 비해 부상자 수가 2.6배를 넘는 반면 민간인의 경우는 0.3배에 그친다.

전투를 치러야 하는 국군은 최소한의 자기 방어 장비를 갖추고 있고 작전상의 지휘자가 있으므로 부상자가 많은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민간인들의 사망과 부상이다. 단순히 본다면 부상자 비율이 매우 낮은 이유가 보호 장비가 없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국군의 경우와 북한지역의 경우를 비교한다면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온다.

전투와 관련 없는 민간인희생자 수가 국군보다 훨씬 크다. 27만 2천 명 대 76만 2천 명. 희생자 상당수는 부상이 없이 사망에 이르렀다. 폭격이 심했던 북한 경우 민간인 부상자는 사망실종자보다 1.6배에 이른다. 남한의 0.3배에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민간인이 군인보다 2.8배 더 희생되었으면서도 부상자 수는 오히려 0.32배였다. 그래서 남한의 민간인희생자 상당수가 전투에 따르는 '부수적 피해'가 아닌 '고의적 학살'에 의한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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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와 이승만.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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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기 남한 민간인 학살 희생자(혹은 피해자)의 규모를 '100만 명' 수준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지?
"먼저 상식처럼 알려져 있는 통계를 볼 수 있다. 제주나 여순, 이후 토벌작전으로 보아 전쟁 전 10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데 큰 이견은 없어 보인다.

국방부의 <한국전쟁사4권>, 760쪽에는 남한비상경비사령부가 1950년 6월부터 10월 사이에 106만 명의 민간인이 피살되었다고 발표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같은 책 1권 39쪽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나는 106만 명의 피살자 발표에 대해 이후 어떤 설명이나 반박의 경우를 못 봤던 것 같다.

한편, 4․19혁명 직후 전국유족회가 주장했다는 114만 명이 있다. 아직 이 근거를 확인한 바는 없지만 당시 이 통계를 유족회가 수집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전국유족회를 구성한 유족회는 대부분 영남지역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인데, 아마 이 통계는 정부 측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나는 부역자가 55만 명, 국민보도연맹원이 30만 명이라는 정부 측 자료나 인사들의 발언에 주목한다. 여기에 더해 5만 명 정도의 재소자가 형무소에 있었다는 사실, 11사단과 8사단으로 이어지는 영호남 토벌작전, 미군폭격의 희생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쟁 전 10만 명의 희생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에는 부역을 의심받은 주민들이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모두 학살당했다는 말이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국민보도연맹원 생존자가 부역혐의 희생자와 중복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중 생존자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고려한다면 이것만으로도 100만 명 희생자 주장이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정부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1953년이면 희생자명부와 가족명부가 작성되어 전국 경찰서에 배포되었음이 확인되는 문서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승만에게 반대세력 제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 한국전쟁기 이승만정권이 선포한 '비상조치령'이 무엇이고 그것을 왜 '위헌'이라고 판단하는지?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은 1950년 6월 25일 공포된 제1호 대통령령이었다. 주요 내용은 1심만으로 증거 설명을 생략한 상태로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악법이었다. 그런데 알려지지 않은 가장 심각한 측면은 1949년 2차 개악하려던 국가보안법의 내용이 바로 이 비상조치령의 것과 같았다는 점이다. 당시 정치적 부담 때문에 시행하지 못했는데 전쟁의 발발이 이 악법의 재사용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전쟁은 이승만에게 반대세력 제거를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법령은 50년 6월 28일자 공보에 실렸는데, 이 때문에 전쟁발발로 정신없던 이승만정권이 25일에 공포할 수 없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6월 25일 공포한 법령이 당일 공보에 실려야 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 아닐까 싶다.

비상조치령의 처벌대상은 수복 후 부역혐의를 받은 민간인들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 조금이라도 무장했다고 판단되면 군법회의가 적용되는 '국방경비법'에 의해 처벌 받았다. 국방경비법 역시 1심만으로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법이었다. 정부자료에 따르면, 비상조치령에 의해 처벌받은 민간인들은 2만 명이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국방경비법에 의한 피해까지 합치면 전체 피해규모는 대략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비상조치령이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은 내 주장이 아니고, 1952년 9월 9일 헌법위원회가 판단한 것이다. 이 결정문은 헌법재판소 도서관 자료집에서 볼 수 있다. 주요 내용은 대한민국 헌법은 비록 1심 재판일지라도 대법원의 판단을 받도록 하는 규정이다. 그런데 비상조치령은 이를 어기고 대법원 판단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어 위헌이라는 것이다." 

- 스페인 등 외국의 부역자 처리과정과 이승만정권의 '부역자' 처리과정을 비교하면 어떤 차이와 특징이 있는지?
"한국전쟁 부역자처리의 대상은 55만 명이었다. 인민군 점령기 불과 3개월 동안의 부역자들이었다. 2만~3만 명이 1심 재판을 받았고 최소 20만 명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나는 한국전쟁기간 중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한 3개월 동안 '부역'한 행위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죽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먼저 비슷한 사례가 있을까 고민했다.

먼저 내전을 치른 스페인을 조사했다. 1936년에서 1939년까지 3년 동안의 내전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공화파를 지지했다는 이유였고 당시 프랑코는 이들을 부역자로 간주했다. 이에 비하면 3개월 부역했다는 이유로 희생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치에서 해방된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나치에게 점령당한 기간은 1940년부터 1944년이었고 처리대상은 35만 명이었다. 처리결과는 학살이 9천 명, 재판이 1600명. 학살당한 9천 명은 수복 초기에 벌어진 경우로 유대인학살 등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경우와 크게 다르다. 수복하던 국군은 여성동맹위원장 등 '장'자만 붙어도 총살하고 북진했지만 이후 경찰이 복귀하기 전까지 무차별 보복은 크게 없었다. 본격적인 학살은 경찰서 사찰계 주임의 복귀와 함께 체계적으로 시작되는데 대략 50년 10월 6일경에 시작된다.

비교사례로 가장 끔찍한 경우가 우리의 친일파 청산과정이었다. 무려 35년간의 식민지 지배를 청산하면서 청산대상은 고작 7천 명에 그쳤다. 이들이 바로 1949년 설립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이었는데 이들 중 처형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비한다면 1950년 있었던 이승만정권의 부역자 처리는 그 자체가 동족 증오에 기초한 터무니없는 대량학살 전쟁범죄였고 자기부정에 해당하는 국가범죄였다."

- 이승만 정권이 한국 민간인들에게 저지른 국가범죄가 단순하게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는지 아니면 고의성이 있다고 보는지? 
"이승만정권에 의해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체계적으로 학살당했다. 전쟁 전 국가의 물리력을 동원하여 국민을 토벌하는 폭압에도 집권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전쟁이 발생했다. 이를 예상했다는 듯이 이승만정권은 비상조치령을 공포하였고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정치범들을 순차적으로 학살하면서 낙동강전선까지 후퇴했다. 한 달 뒤 인민군의 수를 압도한 미군이 북진을 시작하자 인민군 점령지의 민간인들을 '부역자'라며 그 자리에서 학살했으며, 치안이 확보된 후에는 체계적으로 주민들을 연행하여 고문 후 특정지역에서 집단 총살했다. 같은 시기 영호남지역에서는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국군 11사단이 피난민 등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잔혹행위를 저질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전쟁 발발 직후와 수복 직전 이승만정권이 민간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결정했던 문서와 증언들을 확보했다. 이 안에는 이승만정권의 고의적인 민간인처리 계획이 들어 있었다. 후퇴하는 동안 점령군에게 협력할 것으로 보이는 민간인들을 집단수용하라는 문서를 만들어 각 기관에 발송했으며, 수복하기 직전에는 처리할 부역자 명단을 작성하는 등 대책회의를 열었다. 전선을 오르내리면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학살 사건들은 이들이 세웠던 계획의 실행을 증명하는 것이다. 완전히 의도했다는 것 외에 다른 설명이 있을까?"

"대규모 민간인학살 계획 문서들 발견... 역사적 진실 규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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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3월 다시 수복작전을 벌이던 미군에 의해 발견된 학살 장소를 촬영한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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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 혹은 '전쟁범죄'와 관련하여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유족 입장에서는 명예회복일 것이고 내 입장에서는 역사적 진실규명이다.

당장의 구체적 과제는 여전히 말 못하는 유족들의 입을 터주는 것이다. 희생자들이나 유족들의 고통을 풀어주자는 데에는 여야당 정치인들이 반대하지 않던데, 정책으로 결정할 때는 전혀 달라지는 것 같다. 그동안 진실을 은폐하면서 덕을 본 사람들이나, 그냥 그렇게 복종하면서 겨우 안정되게 살았던 유족들에게는 불편한 과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말을 못하면 병이 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공포정치 이제 그만하고 말이나 좀 하게 해줬으면 한다. 전국의 각 지역사회도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희생자나 유족들에게 너그러웠으면 한다. 어디를 가나 어느 분야에서나 이분들을 소외시키는 게 보인다.

그리고 뜬금없는 말로 들리겠지만,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가해자 입장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저런 평범한 자도 악인이 될 것 같다'가 아니라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도 저런 악인이 될 수 있겠구나'하는 성찰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심각한 과제는 인권이 존중되고 평화로운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일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정통성 있는 정부를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대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관권 금권 부정선거에 다수의 시민들이 지게 되고 그 결과 부패하거나 독재성향의 지도자가 뽑히게 되면 결국 대부분의 시민들이 위험한 지경으로 몰려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을 적으로 여긴 이승만정권의 행태가 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민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국민을 존중하는 지도자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 저자 신기철은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에 다녔으며 인천과 구로, 영등포지역 노동운동과 고양 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했다.  지금은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에서 인권평화 연구소장으로 일하면서 지난 조사자료를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 나타난 유족들을 심층면담하고 있다. 저서로는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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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 국민들 적으로 보고 대량학살"

[인터뷰①] <전쟁범죄> 펴낸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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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범죄>의 저자 신기철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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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80년대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울대학교에 당당히 합격했다. 공부를 잘했고 마음도 착했으니 그냥 조용히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서 착실히 다녔으면 지금 그는 물질적으로는 무척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온하고 안락한 삶의 길을 걷지 않았다.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그가 찾아간 곳은 번듯한 대기업이 아니라 1980년대 당시 열악한 인천, 구로, 영등포지역의 공장들이었다. 여러 공장들을 전전하며 그는 노동운동에 몸을 던졌고 그 후 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내가 신기철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였다. 내가 기억하는 신기철의 첫 인상은 참 초라했다. 옷차림과 외모가 검소와 수수 그 자체, 아무것도 꾸미지 않는 순수와 소탈 그 자체였다. 그는 달변가도 아니고 성격이 원만한 편도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조금이라도 더 그를 알아갈수록 '초라한' 겉모습 뒤에 가려져있는 '위대한 정신'과 '뜨거운 정의감'을 지닌 신기철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지난 2010년 말 진실화해위원회가 이명박정권에 의해서 '폐업처리'되었다. 정부차원의 과거사정리가 막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길거리로 나온 40대 중반의 부인과 딸 셋을 둔 '무직' 가장 신기철의 과거사정리는 이제 시작된 것이다. 그는 학자가 아니라 조용한 행동가다. 진실화해위원회를 나온 뒤 그는 들판에서 벌써 3권의 책을 썼다.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에 이어 최근 이승만정권이 한국전쟁기 저지른 민간인학살 사건 <전쟁범죄>를 발간했다. 역사학 전공자인 기자가 그의 앞에서 숙연히 머리가 숙여지는 이유다.

다음은 지난 한 달간 신기철 선생과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승만정권의 학살행위는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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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범죄> 책 표지.
ⓒ 인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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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진실화해위원회 '폐업' 뒤 3번째 저서인 <전쟁범죄>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한국전쟁기 이승만정권이 자행한 자국민에 대한 여러 민간인학살을 '전쟁범죄'로 봐야한다는 시각이 있는데, 동의하나?
"한국전쟁 전후 벌어진 민간인학살은 군경에 의한 대량학살이었다. 서구학자들은 이를 메서커(massacre)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개별사건들에게는 적당해 보이지만 한국전쟁처럼 100만 명의 다양한 희생자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많이 부족한 개념 같다.

민간인에 대해 한국전쟁의 경우 전투에 방해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잠정적인 적으로 여겼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전쟁 전 빨치산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전쟁 후에는 점령군에게 협력할 것이라거나 협력했다는 이유로 국민보도연맹사건이나 부역혐의사건이 저질러졌다. 민간인조차 아군 편과 적군 편으로 가르면서 벌어진 집단살해행위라는 점에 주목한다.

한국전쟁 전후시기 이승만정권에 의한 민간인학살을 포괄적인 전쟁범죄로 보는 데 이견은 없어 보이지만 좁은 의미에서 '반인륜범죄'와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 논란이 있을 것 같다. 생명권의 측면에서는 사소한 차이일 수도 있겠다. 하여튼 좁은 의미에서 전쟁범죄는 점령지 민간인살해를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국민에게 저지른 고문이나 학살행위를 '반인륜범죄'라고 하며, 점령지 적국민에게 저지른 집단학살행위를 '전쟁범죄'로 본다는 해석이 있다.

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승만의 자국민 학살행위를 전쟁범죄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자국민을 독가스로 집단학살한 이라크 후세인은 '반인륜범죄'로서 사형 당했다. 독재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자국민을 학살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승만의 범죄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까? 대량학살이 벌어진 사실만으로도 '반인륜범죄'를 구성한다. 하지만 나는 전쟁 당시 이승만정권이 희생자들을 자국민이라기보다 적의 국민으로 보았던 것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로 보아 이승만정권의 학살행위에는 '전쟁범죄'라는 정의가 더 적절하다고 본다.

한 가지 비교해 보고 싶은 사례는 후퇴하는 인민군 측에 의한 민간인 학살행위, 곧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이다. 국군 수복 직후부터 조사되었던 이 사례는 KWC(Korean War Crimes, 한국전쟁범죄)라는 문서로 보고되었다. 점령군인 인민군이 저지른 민간인학살 행위였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대구10월항쟁이나 제주4․3사건, 여순14연대사건, 그리고 이에 이어 10만여 명을 학살했던 영호남지역의 토벌작전 피해 역시 전쟁범죄에서 봐야 사건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8․15해방 직후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은 스스로를 '해방자'가 아닌 '점령자'로 표현하였으며, 이를 계승한 이승만정권의 입장 역시 같았던 것은 아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이승만정권이 '국민과의 전쟁'을 시작하여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평가하는 이유와 근거는?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협상 결렬을 계기로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해방 후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일본식민지를 해방시켰다기보다는 점령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친일세력을 이용하면서 일반 국민들과는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대구 10월항쟁이나 호남지역의 추수봉기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집단학살사건을 저질렀지만 이를 일반적인 방식으로까지 발전시키지는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미군정을 승계한 이승만정권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직후부터 한국전쟁발발 직전까지 민간인학살 방식을 일반화시켰다. 예를 들어 제주 4․3사건을 생각해 보면, 토벌작전과 함께 민간인 3만 명이 희생되는 시기는 사건 직후인 1948년 4월이 아니라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였다. 여순사건과도 맞물려 있지만 이 시기는 이승만 단독정부의 수립 직후였다. 

영호남지역의 토벌작전 피해 역시 같은 시기에 시작되어 1950년 초까지 진행된다. 이는 잘 주목받지 않고 있는 측면이다. 같은 시기 민간인 인명피해는 10만 명이 넘으며, 여기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전국 각 지역 형무소에 수용되었거나 국민보도연맹원이 되었고 이들은 전쟁 발발 직후 모두 학살당하게 된다.

나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성공한 이승만정권이 남북화해정책보다 적대정책을 택했으며 자신의 반대자들을 모두 적을 돕는 세력, 또는 적으로 보았다는 데에 주목하고 있다. 결국 이승만정권은 반정부 세력 탄압의 관점이 아니라 적을 제거한다는 관점에서 증오심에 가득 차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본다.

그리고 '국민과의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물리력의 정비, 곧 국군의 정비다. 전방 4개 사단을 제외한 후방 4개 사단과 지역 경찰력이 후방 토벌을 빌미로 민간인학살에 동원되었고 결국 1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 대량학살을 초래했다. 이는 국민을 적대시한 정책의 결과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제노사이드(인종 학살) 연구자들은 집단학살 발생의 가장 큰 요인으로 물리력의 준비를 들고 있다. 학살 주체와 무기가 준비되어야 제노사이드가 일어난다는 것인데, 국민이 제어하지 못하는 군대가 준비된다는 것은 이미 국민에 대한 국가범죄가 시작됨을 의미한다고 본다."

"국군의 민간인학살이 인민군 학살행위로 왜곡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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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들은 1951년 3월 다시 수복작전을 벌이던 미군에 의해 발견된 학살 장소를 촬영한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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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진실화해위원회 이영조 상임위원(나중에 위원장)은 '미군전범조사보고서'의 왜곡을 지적한 저자(당시 조사관)에게 '악의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당시 미군보고서의 어떤 점이 왜곡된 것을 지적했나? 
"양평에서는 1950년 9월 28일 후퇴하던 인민군 측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학살이 있었다. 내가 직접 인터뷰한 양평경찰서 사찰계 형사는 당시 희생자 수가 150명 정도였다고 했고, 반면 수복 당시 현장을 목격한 미군 장교는 700명이라고 보고했다.

나는 양평지역 사건을 조사하면서 미군전범조사보고서(KWC#33) 내 사진자료를 보게 되었다. 여기에는 1950년 9월 말 후퇴하는 인민군 측이 학살했다는 증거로 쓰인 사진들이 있었다. 이중 2장의 사진을 보자. 

위 사진들은 1951년 3월 다시 수복작전을 벌이던 미군에 의해 발견된 학살 장소를 촬영한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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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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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여기서 일단 눈에 띄는 점은 사망한 지 4~5개월 되었다는 미 조사관의 법의학적 소견이었다. 1951년 3월 발견했으니까 4~5개월 전이면 1950년 10~11월이 된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이 사진은 1950년 9월 28일 국군 수복 후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을 촬영한 것으로 봐야 한다.

또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자 시신은 모두 수습되었다는 증언과 정황을 주목할 수 있다. 두 번째 사진의 백골화된 시신은 발견 당시까지 노골적으로 방치되었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시신이 방치되는 경우는 대부분 1950년 9월 28일 국군 수복 후 한국 민간인이 국군에 의해 부역혐의로 총살당한 경우이며, 인민군 측에 의한 희생자의 시신이 방치된 경우는 확인된 바가 없다.

희생지역도 문제가 되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지역과 국군 수복 후 부역혐의사건 피해지역이 1km 정도 차이가 나는데, 위 시신을 발견한 지역은 인민군 측에 의한 사건지역이 아니라 국군 측에 의한 부역혐의 피해지역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이 사진의 시신들은 인민군 측에 의한 희생자가 아니라 국군 수복 후인 1950년 10월 중순경 이후 희생자로 판단된 것이다. 결국 미군 측의 사진자료는 해당 사건과 상관없는 것으로 나는 진실위 근무당시 오히려 국군 수복 후 벌어진 부역혐의사건의 일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이영조 위원장 체제의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의혹 제기 수준에서 서술하라고 결정했다."

그러면 당시 미군보고서의 왜곡을 지적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저자)에게 왜 이영조 상임위원은 '악의적'이라고 지적했다고 생각하나?   
"진실화해위원회는 3개의 조사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사1국은 항일독립운동과 인민군 측에 의한 집단희생사건, 조사2국은 (한국)군경에 의한 집단희생사건, 조사3국은 인권침해사건을 조사했다. 당시 조사1국의 조사를 총괄 지휘했던 분이 이영조 상임위원이었다.

그런데 조사1국의 인민군 측에 의한 사건의 상당부분은 이미 사건 직후에 미군과 경찰이 조사한 사건이었으므로 당시 조사보고서인 KWC조사자료가 가장 결정적인 입증자료였다. 그러니 나의 지적이 이영조 상임위원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KWC 조사자료의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린 것으로 여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여간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한다면 한 자료에서도 많은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국방부에서 조사한 증언록 역시 진실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보고 있다. 자료를 올바로 해석하자는 게 과연 '악의적'인지 여부는 독자들이 판단하리라 믿는다."

"김구 선생 지지했던 군인들, 이승만정권 아래서 전부 학살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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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형무소에서 이승만정권에 희생당한 해군 창설 멤버 전호극 소령.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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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기 형무소에 이미 갇혀있던 주요 반정부인사의 학살사례를 소개하면?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를 토대로 19개 형무소 희생자 수를 추정해 보면 적어도 2만 명을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두 전쟁 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거나 재판과정에 있던 분들이다. 학살된 분들 중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했던 분들도 많아서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아마 근현대사를 다시 정리해야 하는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집단학살사건에 있어서 반정부인사의 죽음을 따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어 보이지만 그 동안 알려져 있던 것에서 벗어나 있는 사례들이 있다. 형무소에서 희생되신 분들을 구분지어 본다면 제주4·3토벌작전에서 연행되신 분들과 여순토벌작전에서 연행되신 분들이 가장 큰 규모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인 숙청 군인들도 한 그룹이 될 수 있다.

마산형무소에서 희생당한 해군 창설 멤버 전호극 소령(1913년생)을 예로 들어보자. 전쟁 전 숙청당한 군인들 수는 장교 242명을 포함하여 4400여 명이 된다. 김구 계열인 전 소령은 1949년 2월 여순사건과 관련 있다며 연행되는데, 같은 해 6월 김구 선생의 암살 후 징역 6년형을 선고받는다. 전 소령은 같은 해 5월 6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이등병으로 강등된 후 강제 퇴역당해 민간인 신분으로 마산형무소에서 수용생활을 했다. 그런데 마산형무소에는 같은 이유로 수용당한 군인들이 4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숙청당한 군인들은 1950년 7월 초 마산과 거제 사이 괭이바다라는 곳에서 동료 해군 헌병대들에 의해 학살당한다. 결국 김구 선생을 지지했던 군인들이 이승만정권 아래서 전부 학살당한 것이다. 

전쟁 직전 국군의 수가 9만 8천 명이었으니 숙청당한 군의 규모가 무척 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승화 장군 등의 수기를 보면 당시 용감하고 실력 있는 군인들이 숙청당해 안타까워하는 내용을 종종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이 한국전쟁 초기 왜 국군이 그렇게 일찍 붕괴되었는지 설명해 주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그 대표적 사례가 전호극 소령이라고 생각한다."

- 인민군 후퇴시기 민간인학살과 관련하여 진실이 왜곡된 사례가 있었는가?
"경찰의 공격으로 희생당한 영광 오길종 일가족 3명이 좌익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된 경우는 진실이 완전히 왜곡된 사례라고 하겠지만 이렇게 명확히 확인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내가 진실위에서 조사한 민간인학살사건 대부분의 경우는 기본적인 진실조차 규명되지 않았다. 여러 제약으로 정부 측 기록에서 확인되는 의문점을 지적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것이 인민군 후퇴시기의 학살명령이다. 인민군 측에 의한 학살 중 84.6%가 1950년 9월 26~30일 사이에 벌어졌으니 조직적인 명령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조차도 당시 순차적으로 수복되는 전황을 보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수복 후나 같은 시기에 발생하는 사건들이 많다.

하여튼 약간 차이가 있지만 국방부나 진보 학자집단 모두 인민군의 학살명령이 있었다는데 견해가 일치된다. 하지만 나는 양쪽 다 주장의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특히 국방부나 검찰은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책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그 근거로 체포된 군산(당시 옥구군) 미면 신관리 인민위원장의 자백을 들고 있다. 문서 한 장 남은 것이 없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그 시기 전국의 희생사건을 일개 리 인민위원장의 자백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게다가 군산에서 사건이 발생하던 1950년 9월 28일 서울 영등포에서 체포된 이 인민위원장은 재판 출석자 명단에서는 다른 10여 명과 함께 사라진다. 나는 이미 부역혐의로 학살당한 뒤였기 때문에 생긴 현상으로 추정한다. 갖은 고문이 횡행하던 시대였고 재판도 받기 전에 처형이 이루어진 시대의 자백, 그 조차 입증자료도 없고. 이걸 믿는 것이 과연 상식적일까?" 

☞ 인터뷰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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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출신인 저자는 지난 10여 년간 수집해온 증언자료와 조사기록 등을 묶어서 고양 금정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 이 책은 한국전쟁 시기 부역 혐의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 문제를 가장 심층적으로 조사·분석한 매우 귀중한 저술이라 하겠다.

책 속에서 밝힌 사건의 배경과 학살의 전모, 희생자의 유형과 가해자의 실체, 그리고 유족들이 받았던 피해사례 등은 한국전쟁 당시 광범위하게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전체 실상을 알려주기에 손색이 없다. 금정굴 사건을 통해 낱낱이 드러난 사례들은 곧 전국적으로 자행된 학살사건의 실체라 할 것이다.

특히 저자가 직접 채록한 증언들은 반세기 이상 참담한 역사를 외면하고 부정해 왔던 우리들의 체부를 아프게 찌르고 있다. 신 전 팀장은 희생자와 가해자들의 기억과 증언과 관련된 내용들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건조한 문체로 정리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역사적 망각을 되돌리기에 충분할 만큼 생생하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출신이 공개하는
최초의 진실·화해 보고서!

지난해 12월 3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됐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5년 동안 총 1만 1,000여 건의 사건을 조사 완료했고, 이중 8,500여 건을 진실 규명했다.
하지만 이런 외형적 ‘성과’와 달리 진실화해위원회는 활동 종료 시점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명박 정부로의 정권교체 이후 그간의 조사활동이 이념 논란으로 변질되는 후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급기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등 피해 유족단체들이 진실화해위원회의 종합보고서가 부실한 내용으로 학살자들에게 면죄부를 줬다며 성토하고 나섰고, 학계에서도 보고서가 군경과 좌익에 의한 희생을 병렬적으로 기술해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의도적 폭력이란 성격을 희석시켰다는 비판이 나왔다. 또한 미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도 미국 쪽 설명 위주로 기술해 희생의 불가피성을 부각시켰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마디로 ‘진실’ 없는 진실화해위원회란 지적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마음이 착잡한 이들은 조사를 직접 담당했던 일선의 조사관들일 것이다.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2국 조사1팀장 역시 마찬가지다. 고양시 금정굴 민간인 학살사건을 담당했던 그는 진실도 화해도 이루지 못한 지난 5년간의 활동에 대해 많은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가 이 책을 출간한 동기 역시 그와 같은 착잡함과 아쉬움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진실과 화해를 위해’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출신이 최초로 공개하는 진정한 의미의 조사보고서라 할 수 있다.

고양 금정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최초의 심층 보고서


한국전쟁 시기 수많은 민간인들이 무고하게 학살되었다. 참으로 참혹하고 비극적인 희생이었다. 한국전쟁은 전 국토가 뒤섞인 전쟁터였고, 밤낮으로 점령군이 바뀌었다. 점령군이 좌우익으로 교체될 때마다 응징 보복의 학살이 마치 톱질하듯이 번갈아 자행되었다.
특히 수복해 들어온 남한의 군대, 경찰, 우익단체에 의한 보복학살은 오랜 시간 동안 그 진실이 드러나지 못했다. 인민군 편에 가담했거나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협력했던 사람들은 ‘부역자’로 낙인 찍혀 학살 대상이 되었다. 적군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부역혐의를 뒤집어쓴 채 야만적으로 학살당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금정굴 사건 역시 마찬가지이다. 금정굴 사건은 서울 수복 직후인 1950년 10월 고양경찰서 소속 경찰관, 의용경찰대, 태극단(6·25전쟁 당시 고양지역에서 결성된 반공청년조직)이 최소 153명의 주민을 부역자로 몰아 고양지역의 한 폐광인 금정굴에서 총살한 사건이다.
하지만 금정굴 사건은 발생일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나도록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고, 피해 유족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지난날 학살을 주도했던 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한국 사회를 좌우해 오면서 그들은 희생자와 그 가족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씌웠고, 침묵을 강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 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민간인 학살의 실체도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피해 유족들은 강요당한 침묵에서 벗어나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섰고,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금정굴 사건 역시 1995년 10월 희생자들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활동이 본격화됐다.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 때부터 진실 규명을 위한 노력을 벌였던 신기철 전 조사관은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에 참여한 뒤 본격적으로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매달려 왔다. 마침내 그는 2007년 “금정굴 사건은 당시 고양경찰서장 책임 아래 자행된 집단살해이며, 그 최종 책임은 국가에 귀속된다”는 <진실화해위원회 1차 보고서>를 통해 진실에 다가설 수 있었다. 또한 국가가 유해를 봉안할 수 있는 추모시설 설치 등을 신속히 처리할 것을 권고문에 담아내는 성과를 얻었다. 그 후에도 신 전 조사관은 2009년 국가기록원의 보존 자료를 통해 금정굴 사건 당시 고양경찰서에서 조직적으로 학살에 개입한 사실을 증언하는 문서를 확보하기도 했다. 이는 학살의 주체를 확증하는 자료이자, 일선 경찰서의 단독 행동이 아니라 그 윗선의 조직적 개입을 확인할 수 있는 단초였다.
하지만 2008년 정권 교체 이후 금정굴 사건의 진실 규명 활동은 벽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1995년 발굴된 금정굴 사건 피해자들의 유해는 16년이 지나도록 서울대병원 법의학교실에 방치되어 있고, 애초 진실화해위원회가 1차 보고서에서 권고한 추모시설 설치는 현재까지도 아무런 진척사항이 없는 실정이다. 또한 새로운 조사 내용이 드러났지만 이를 반영하는 2차 보고서는 끝내 채택되지 못했다.
결국 신 전 조사관은 지난 10여 년간 수집해온 증언자료와 조사기록 등을 묶어서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라는 책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이 종료된 지 두 달이 되는 시점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제노사이드의 실상을 알려주는
최초의 역사 기록서


신 전 팀장은 금정굴 사건의 진실 규명을 위해 그동안 각종 공공기록을 세밀히 수집하여 검토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회고록·증언록들을 낱낱이 검토했고, 생존해 있는 관련 인물들을 일일이 찾아 생생한 증언을 청취했다. 또한 관련 학술연구물은 물론 미국 측의 자료들까지 조사하여 제시했다. 그는 이처럼 매우 공들여 조사한 다양하고 풍부한 관련 자료들을 원고지 1,800매라는 방대한 분량의 내용으로 정리해냈다.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는 주로 고양 금정굴 민간인 학살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에서 밝힌 사건의 배경과 학살의 전모, 희생자의 유형과 가해자의 실체, 그리고 유족들이 받았던 피해사례 등은 한국전쟁 당시 광범위하게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전체 실상을 알려주기에 손색이 없다. 금정굴 사건을 통해 낱낱이 드러난 사례들은 곧 전국적으로 자행된 학살사건의 실체라 할 것이다. 특히 신 전 팀장이 채록한 증언들은 반세기 이상 참담한 역사를 외면하고 부정해 왔던 우리들의 체부를 아프게 찌르고 있다. 신 전 팀장은 희생자와 가해자들의 기억과 증언과 관련된 내용들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건조한 문체로 정리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역사적 망각을 되돌리기에 충분할 만큼 생생하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 대해 역사학계의 참스승이라 할 이이화 선생은 “금정굴 사건이라는 하나의 진실을 통해 광란의 시대에 저질러진 ‘제노사이드(genocide)’ 전체의 실상을 알려주는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는 한국전쟁 시기 부역 혐의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 문제를 가장 심층적으로 조사·분석한 매우 귀중한 저술이라 하겠다.

 

 

 

"서울대병원에 16년째 방치된 유골, 부끄럽다"
[인터뷰]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쓴 신기철 '금정굴사건' 전 진실위 조사팀장
김성수 (wadans) 기자

한국전쟁 초기 한강 다리를 몰래 끊고 도망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은 자기의 "서울을 사수한다"는 말만 믿고 서울에 잔류한 민간인들에게 위로나 사과가 아닌 무자비한 집단학살로 보답한다. 역사에 '적반하장'의 예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람은 이승만일 것이다.

 

1950년 10월 9일부터 10월 25일 사이, 153명의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들은 경찰에 의해 고양시 금정굴에서 집단학살을 당한다. 당시 고양시에서만 최소 천 명의 민간인들이 법적 절차도 없이 희생당했다. 희생자들 대부분은 소극적 부역자나 부역과 무관한 그 가족 등이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이승만 정부가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상황에서 인민군이 총을 들이대고 "밥을 달라, 일을 해라" 하는데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었겠나. 그러나 도망갔다 돌아온 이승만 정권은 이런 민간인들을 오히려 '빨갱이 부역자'로 몰아 학살했다. 학살사건 이후에도 희생자 가족들은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국가에 재산을 빼앗겼다. 연좌제로 취업도 어려웠고,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집요하게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1995년 금정굴사건 희생자 유족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힘으로 금정굴에서 희생자 유골을 발굴했다. 유골에는 여성과 아이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도 상당수 있었다. 학살 당시 금정굴에서는 희생자들을 굴 방향으로 무릎을 꿇게 하고 등 뒤에서 사격, 살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책표지
ⓒ 자리
국가범죄

2007년 6월 진실화해위원회(이하 진실위)는 금정굴에서 국가가 저지른 전쟁범죄에 의해 고양지역 주민들이 희생되었다고 규명한 바 있다. 가해책임은 고양시 경찰관과 경찰의 지휘를 받으며 보조역할을 수행한 당시 우익단체에도 간접책임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진실위는 2007년 관련기록 수정, 희생자 유족에 대한 국가사과, 임시 보관 중인 유해 영구봉안, 위령시설 설치, 관련법률 정비, 역사관 건립 등을 국가에 권고했다.

 

그 후 4년이 가까워져 오도록 국가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그래서 국가가 진실을 밝혔음에도 지금도 희생자 유해는 16년째 서울대병원창고에 '임시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 창고조차도 서울대병원이 재건축을 한다고 올해 안에 유해를 옮길 것을 요구했다. 유가족들은 지금 하루하루 속이 바짝 타 타들어 간다.

 

신기철씨는 진실위에서 금정굴사건을 조사한 조사팀장이었다. 그는 진실위 조사관 중 처음으로 금정굴사건에 대한 책,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 고양 금정굴사건으로 본 민간인 학살>을 발간했다. 다음은 지난 2월 중 신기철씨와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서슬 퍼런 남과 북의 국가권력 앞에선 모두 나약한 개인들이었을 뿐"

 

  
신기철씨.
ⓒ 신기철
신기철

- 진실위에서 금정굴사건보고서를 2007년에 냈는데 이번에 단행본 책을 따로 발간하게 된 동기나 이유가 있나?

"금정굴사건 보고서는 민간인 학살사건으로서는 나주 동박굴재 사건에 이어 두 번째 것이었다. 당시 위원회 활동의 성과가 뭔지 보여 달라는 독촉이 심하던 때여서 서두른 점이 있었고, 그래서 부족한 점이 많았다. 보고서의 분량 때문에 내가 담고 싶었던 내용 중 많은 부분이 누락되기도 했다. 보고서를 낸 이후 새롭게 확인된 사실들도 담아내고 싶었다. 단행본으로 책을 따로 내게 된 것은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의 후속작업으로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신기철씨 약력

1983년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1990년 ~ 1997년  서울 남부금속 노동조합

1997년 ~ 2003년  고양시민회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년 ~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 책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금정굴 사건이 저질러지게 된 전국적 맥락 또는 경기도 단위의 맥락이 채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국내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사회과학적 연구도 찾을 수 없었다. 고양지역에서도 고양경찰서 외에는 경찰조직이 어떻게 개입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다른 나라 사례를 참고로 몇 가지 시도를 하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객관적 사실의 열거 외에 별다른 해석을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욕심이 지나쳤던 것이다."

 

- 금정굴사건에 대해선 기존에 나온 몇몇 글이 있지만 부역혐의 희생사건의 유형으로는 처음 정리된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의의와 주요 내용을 소개하면?

"이 책을 통해 국가가 사건 발생 직후부터 고양 금정굴 사건을 알고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숨겨왔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 검찰 스스로가 200여 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전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60년이 넘도록 직간접으로 희생자들의 가족들을 괴롭혔다. 이건 파렴치의 수준을 넘어서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래서는 국가가 조직폭력배 집단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아직도 좌우 갈등의 문제로 바라보는 편견을 바로 잡고자 했다. 학살에 가담한 고양경찰서 의용경찰대원 상당수가 부역자였다. 물론 이들도 전쟁 전에는 대한청년단원, 대동청년단원, 국민보도연맹원들이었다. 반면 희생자들 역시 대한청년단원, 호국군, 마을 반장, 마을 유지들이었다. 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전쟁 전에는 모두 한 마을 주민들이었다. 과연 누가 좌익이고 누가 우익이었다는 말인가? 서슬 퍼런 남과 북의 국가권력 앞에선 모두 나약한 개인들이었을 뿐이었다.

 

이 책은 '부역혐의 희생사건'을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다른 유형의 학살사건도 마찬가지이지만 입에 담기조차 꺼려했던 사건들이다 보니 희생 시기나 희생경위처럼 진실의 기본이 되는 '객관적 사실'조차도 정확하질 않다. '망각'이라는 일종의 자기방어인 셈이다. '부역혐의 희생사건'의 '객관적 사실'을 명확히 한 후에야, 전국에 이와 같은 일이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고양금정굴 사건을 조금 더 자세히 다루었을 뿐이며, 이 정도의 내용은 전국 어느 시·군·구에서도 확인되는 사건이다. 북한 사회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아직도 이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있는 곳이 아주 많이 있다. 이것이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중 하나다."

 

- 1995년 10월 유족들의 힘으로 금정굴을 발굴했고, 2007년 진실위에서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규명했다. 그 후 가해자들의 반성이나 고백이 있었나?

"2008년 경찰청장 명의의 유감 표명은 있었다. 2007년 진실규명 당시 태극단원의 증언이 진실규명에 크게 도움이 되었지만 본인들의 행위에 대해선 모든 진실을 말하진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희생자 유골을 안치하는 데 반대하는 것을 보면 결코 반성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 사건에 대한 위령사업을 공약으로 내걸어 당선된 고양시장도 별다른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의 편견을 넘어서려고도, 더 이상 진실을 알려고도 하질 않는다"

 

  
금정굴현장
ⓒ 신기철
금정굴

- '학살' 인정을 위한 싸움도 여전히 진행 중인데, 전 고양시장은 국가에서 진실규명한사건 임에도 금정굴 위령사업을 왜 반대했나?

"고양시장이 반대한 이유는 태극단 등 민간단체가 반대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다만 내가 면담한 바로는 이 사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태극단은 그리 크게 반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보훈단체들의 견해였는데 이 단체들은 이 사건 희생자들이 좌익 활동으로 처단된 것이므로 위령사업이 곧 좌익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분들은 자신들의 편견을 넘어서려고도, 더 이상 진실을 알려고도 하질 않는다. 이 영향이 현 시장에게도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보도연맹사건 등을 비롯해 한국전쟁 당시 거의 무차별적 민간인학살을 보면 요즘 구제역사건으로 가축을 '무작위'로 살처분, 생매장 하는 것과 너무 유사한 양상이다. 당시 이런 무자비한 민간인학살을 통해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집단이 있었나?

"이승만 집단이었다고 본다. 이승만을 지지했던 정치집단조차도 전쟁 후 배척당하는 것을 보면 가장 큰 이익을 본 집단이 당시 정부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결국 이승만 일인을 중심으로 한 일개 정치 파벌이 아니었나 싶다. 최근까지 연장해서 본다면 아마 국가보안법과 미국으로 상징되는 초헌법 집단이었겠다."

 

- 16년 동안 방치되었던 유골의 안치는 가해자 국가가 먼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라고 본다. 진실규명사건임에도 왜 아직까지 희생자유골이 제대로 된 시설에 모셔지지 못하고 병원 창고 같은 임시시설에 보관되어있다고 보나?

"진실화해위원회가 발굴한 유골도 어쩌지 못하고 임시보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유족들이 직접 발굴한 금정굴사건 유골이 서울대병원에 보관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인지 모르겠다. 유족들로서는 서울대 이윤성 교수님께 너무 감사드리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후손된 도리로서 너무 부끄러운 일로 여기고 있다. 어떻게 해보려는 고양시장으로서도 이명박 정부가 기피하고 있는 일을 일개 지자체에서 하려니 쉬운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본다."

 

- 그동안 금정굴사건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등의 명예회복과 화해를 위한 국가의 조치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나? 일부 유족들은 2010년 6월 국가배상소송을 했는데 진전이 있나?

"현재 국가배상 소송이 진행 중에 있다. 담당 재판부는 사건의 실체에 대해 다루어 보려고 하는 반면 피고로 나선 고양경찰서 경찰관들은 소멸시효만을 주장하고 있는 형편이다."

 

- 금정굴 외에도 고양시 성석동 등에도 많은 시신이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는데, 고양시의 학살 추정지 현황을 이야기하면?

"직접 목격한 분들의 증언이므로 성석동에 20여 구가 매장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현천리의 시신은 봉분이 조성되어 있어 발굴의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한강변 희생지와 화전리는 매장한 것이 아니므로 현재 발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본다."

 

"문제는 당시의 잣대에 대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 책에서 "학살은 이승만 '정치의 수단'이었고 '집권세력의 광기'에서 발생한 정치적 결과" 였다고 정의했는데 좀 부가해서 설명하면?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이 워낙 잔인하고 비이성적이므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흔히 있었다. 이는 설명할 수 있는 자료에 접근하기도 어렵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희생자 유족 등 증언 가능한 사람들을 면담하기 어려운 사정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지난 5년간의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한 내용이 있다. 이를 근거로 볼 때 이승만 정부는 정치적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학살을 저질렀다고 보는 것이다."

 

- 2008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울산국민보도연맹사건에 대해 국가차원의 사죄를 했다. 그리고 매년 위령제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해 군과 경찰이 사과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부역자 명부', '처형자 명부'는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나로서는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겠다. 그러니 사과가 말로 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역자나 처형자 명부들은 진실화해위원회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도 결정적인 자료에 해당하지만 볼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 책에서, 60년 전보다 시민사회는 진보했으나 이념과 제도는 달라진 것이 없고, 그래서 후손들에게 물려 줄 대한민국은 여전히 위험해 보인다고 했는데, 금정굴사건 조사팀장 입장에서 고양시장과 이명박 정부에 건의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념적 관점에서 벗어나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았으면 좋겠다. 흔히 '지금의 잣대로 재지 마라'고들 한다. 그럼 당시의 잣대로라도 보라고 권하고 싶다. 문제는 당시의 잣대에 대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어쨌든, 이 사안에 대해서는 이명박 정부와 고양시장에게 건의하거나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잔학했던 국가범죄에 대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회정의를 위해서, 사회통합을 위해서 당당하게 관철해 나가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책,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 고양 금정굴사건으로 본 민간인 학살>(출판사 : 자리, 464쪽, 28,000원)

2011.03.04 09:27 ⓒ 2011 OhmyNews

Posted by 미메시스 미메시스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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