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보도연맹원 학살 주도 군에서 시켰으니까 했겠지”

 

 

‘20만 양민학살’ 보도연맹 관리 검사 육성증언 들어보니

 

 

시민단체 선우종원씨 인터뷰 공개
“경찰이 주도…군에서 시켰겠지”
무고한 양민 학살 자행 고백
2기 진실위·특별법 제정 필요성


 

한국전쟁 충북유족회원 등이 21일 충북엔지오센터에서 국민보도연맹 조직·관리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선우종원씨의 보도연맹 관련 증언 영상을 시청하고 있다. 한국전쟁 충북유족회 등은 선우씨의 증언 영상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충북역사문화연대 제공
한국전쟁 충북유족회원 등이 21일 충북엔지오센터에서 국민보도연맹 조직·관리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선우종원씨의 보도연맹 관련 증언 영상을 시청하고 있다. 한국전쟁 충북유족회 등은 선우씨의 증언 영상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충북역사문화연대 제공

 

 

“의식분자라기보다 의식 없는 것들이 많았지. 공산당이 뭔지 압니까. 모르고 든 것들이 많지….”

 

한국전쟁 때 수많은 희생자를 낸 국민보도연맹을 조직·관리한 것으로 알려진 ‘반공 검사’ 선우종원(1918~2014)씨의 육성 증언이 나왔다. 그는 서울지검 검사, 법무부 초대 검찰과장, 치안국 정보수사과장 등을 지내면서 1949년 좌익 전향자 등을 모아 보도연맹을 만들고 관리한 주역이다.

 

한국전쟁 충북유족회(회장 이세찬)와 충북역사문화연대(대표 박만순) 등은 21일 오후 2시 충북엔지오센터에서 연 ‘2016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충북 합동추모제’에서 선우씨의 증언이 담긴 영상을 공개했다. 5분4초 분량의 이 영상엔 2007년 10월18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의 조사관이 선우씨의 사무실을 찾아 증언을 담는 모습이 담겨 있다. 박 대표는 “보도연맹을 조직·관리한 고위급 인사의 육성 증언을 공개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선우씨는 영상에서 보도연맹 가입자들의 성향을 묻는 질문에 “충북 괴산에서 삐라를 뿌리다 잡힌 사람들은 (남로당 등) 아무 곳에도 들은 데 없는 진짜 농민들이었다. 공산당으로 볼 수 없었다. (이들처럼) 알고 들었던 것들은 적었다”고 했다.

 

그는 보도연맹원 학살은 경찰이 주도하고 군인이 뒷받침했다고 밝혔다. 그는 “경찰이 (죽이는 것을) 주도했다. 하지만 경찰이 단독으론 절대 못 한다. 군에서 하라고 하니까 했겠지”라고 증언했다.

 

박 대표는 “선우씨의 증언은 당시 국가권력이 공산당원이 아닌 걸 알면서도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전국유족회 등은 한국전쟁이 벌어진 뒤 전국에서 보도연맹원 20여만명이 희생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 대표는 “2기 진실화해위원회를 추진하고, 과거사법을 개정해 배·보상 특별법 제정, 과거사 재단 설립, 유해 발굴 등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4912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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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달간 20만명 학살한 이승만, 친일파 처형은 0명"

[인터뷰②] <전쟁범죄> 펴낸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장




☞ 인터뷰 1편에서 이어집니다.

- 한국전쟁기 민간인들에 대해 일부 미군들이 저지른 행위는 '전쟁범죄'로 볼 수 있는가?
"'전쟁범죄'는 가해자 의도를 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폭격의 경우 가해자 의도를 피하기 위해 '부수적 피해'라는 용어가 개발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용어는 '아무나 죽어라' 하는 식이 될 수밖에 없는 '폭격'이나 '적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피난민간인을 살해하는 '토벌작전'을 합리화한다. 그러다 보니 이 자체가 전쟁범죄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한 번의 우발적인 사건이어도 문제가 있지만 학살이 반복되었다면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부수적 피해'와 '전쟁범죄'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민간인을 적으로 여기고 공격한 행위는 충분히 입증된다. 1950년 7월 26일 미 지상군이 자신들이 소개시킨 피난민임을 알면서도 공격했던 영동 노근리 사건은 이미 전 클린턴 대통령이 사과 비슷한 '유감' 표명을 했다.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사건이 1950년 7월 10일 연기군 서면 월하리에서 있었으며, 8월 12일에는 창원(마산)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씨 재실에서 피난하던 주민 86명이 미군에게 살해당했다. 기록을 보면 미군들은 희생자들이 모두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민군 점령 지역의 민간인이나 민간시설을 공격한 행위도 많았는데, 이를 전선의 이동과 비교해 보면 국민보도연맹사건과 미군폭격사건이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을 미군 항공기가 감시하는 모습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 한국전쟁 중 남쪽 민간인들이 입은 피해는 불가피한 '부수적 피해가'가 아니라 민간인학살이 이승만정권의 '주대상'이었다고 볼 수 있나? 
"전쟁기의 민간인피해를 대개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표현한다. 전쟁은 군인들 사이의 목숨을 건 경쟁이라고 보기 때문에 민간인들의 생명과 무관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이는 전쟁의 참상을 숨기기 위한 완곡어법에 지나지 않는다. 십자군전쟁 등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옛 전쟁에도 점령지역의 민간인을 몰살시키는 사례가 예외 없이 벌어졌다. 이는 오늘날의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나는 국방부의 <한국전쟁사1권> 39쪽에서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를 각각 사망, 부상, 실종으로 구분한 통계를 보고 놀랐다. 군인 경우 사망 22만 8천 명, 부상 71만 7천 명, 실종 4만 4천 명이고, 민간인의 경우 사망 37만 4천명, 부상 23만 명, 실종 38만 8천명이었다.

실종자를 모두 사망으로 볼 수 없겠지만 민간인학살 희생자 대부분이 실종처리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고 일단 사망자와 실종자 수를 합해 부상자 수와 비교해 보았다. 군인의 경우 사망실종자에 비해 부상자 수가 2.6배를 넘는 반면 민간인의 경우는 0.3배에 그친다.

전투를 치러야 하는 국군은 최소한의 자기 방어 장비를 갖추고 있고 작전상의 지휘자가 있으므로 부상자가 많은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민간인들의 사망과 부상이다. 단순히 본다면 부상자 비율이 매우 낮은 이유가 보호 장비가 없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국군의 경우와 북한지역의 경우를 비교한다면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온다.

전투와 관련 없는 민간인희생자 수가 국군보다 훨씬 크다. 27만 2천 명 대 76만 2천 명. 희생자 상당수는 부상이 없이 사망에 이르렀다. 폭격이 심했던 북한 경우 민간인 부상자는 사망실종자보다 1.6배에 이른다. 남한의 0.3배에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민간인이 군인보다 2.8배 더 희생되었으면서도 부상자 수는 오히려 0.32배였다. 그래서 남한의 민간인희생자 상당수가 전투에 따르는 '부수적 피해'가 아닌 '고의적 학살'에 의한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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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와 이승만.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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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기 남한 민간인 학살 희생자(혹은 피해자)의 규모를 '100만 명' 수준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지?
"먼저 상식처럼 알려져 있는 통계를 볼 수 있다. 제주나 여순, 이후 토벌작전으로 보아 전쟁 전 10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데 큰 이견은 없어 보인다.

국방부의 <한국전쟁사4권>, 760쪽에는 남한비상경비사령부가 1950년 6월부터 10월 사이에 106만 명의 민간인이 피살되었다고 발표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같은 책 1권 39쪽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나는 106만 명의 피살자 발표에 대해 이후 어떤 설명이나 반박의 경우를 못 봤던 것 같다.

한편, 4․19혁명 직후 전국유족회가 주장했다는 114만 명이 있다. 아직 이 근거를 확인한 바는 없지만 당시 이 통계를 유족회가 수집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전국유족회를 구성한 유족회는 대부분 영남지역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인데, 아마 이 통계는 정부 측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나는 부역자가 55만 명, 국민보도연맹원이 30만 명이라는 정부 측 자료나 인사들의 발언에 주목한다. 여기에 더해 5만 명 정도의 재소자가 형무소에 있었다는 사실, 11사단과 8사단으로 이어지는 영호남 토벌작전, 미군폭격의 희생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쟁 전 10만 명의 희생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에는 부역을 의심받은 주민들이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모두 학살당했다는 말이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국민보도연맹원 생존자가 부역혐의 희생자와 중복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중 생존자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고려한다면 이것만으로도 100만 명 희생자 주장이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정부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1953년이면 희생자명부와 가족명부가 작성되어 전국 경찰서에 배포되었음이 확인되는 문서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승만에게 반대세력 제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 한국전쟁기 이승만정권이 선포한 '비상조치령'이 무엇이고 그것을 왜 '위헌'이라고 판단하는지?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은 1950년 6월 25일 공포된 제1호 대통령령이었다. 주요 내용은 1심만으로 증거 설명을 생략한 상태로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악법이었다. 그런데 알려지지 않은 가장 심각한 측면은 1949년 2차 개악하려던 국가보안법의 내용이 바로 이 비상조치령의 것과 같았다는 점이다. 당시 정치적 부담 때문에 시행하지 못했는데 전쟁의 발발이 이 악법의 재사용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전쟁은 이승만에게 반대세력 제거를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법령은 50년 6월 28일자 공보에 실렸는데, 이 때문에 전쟁발발로 정신없던 이승만정권이 25일에 공포할 수 없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6월 25일 공포한 법령이 당일 공보에 실려야 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 아닐까 싶다.

비상조치령의 처벌대상은 수복 후 부역혐의를 받은 민간인들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 조금이라도 무장했다고 판단되면 군법회의가 적용되는 '국방경비법'에 의해 처벌 받았다. 국방경비법 역시 1심만으로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법이었다. 정부자료에 따르면, 비상조치령에 의해 처벌받은 민간인들은 2만 명이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국방경비법에 의한 피해까지 합치면 전체 피해규모는 대략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비상조치령이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은 내 주장이 아니고, 1952년 9월 9일 헌법위원회가 판단한 것이다. 이 결정문은 헌법재판소 도서관 자료집에서 볼 수 있다. 주요 내용은 대한민국 헌법은 비록 1심 재판일지라도 대법원의 판단을 받도록 하는 규정이다. 그런데 비상조치령은 이를 어기고 대법원 판단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어 위헌이라는 것이다." 

- 스페인 등 외국의 부역자 처리과정과 이승만정권의 '부역자' 처리과정을 비교하면 어떤 차이와 특징이 있는지?
"한국전쟁 부역자처리의 대상은 55만 명이었다. 인민군 점령기 불과 3개월 동안의 부역자들이었다. 2만~3만 명이 1심 재판을 받았고 최소 20만 명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나는 한국전쟁기간 중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한 3개월 동안 '부역'한 행위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죽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먼저 비슷한 사례가 있을까 고민했다.

먼저 내전을 치른 스페인을 조사했다. 1936년에서 1939년까지 3년 동안의 내전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공화파를 지지했다는 이유였고 당시 프랑코는 이들을 부역자로 간주했다. 이에 비하면 3개월 부역했다는 이유로 희생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치에서 해방된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나치에게 점령당한 기간은 1940년부터 1944년이었고 처리대상은 35만 명이었다. 처리결과는 학살이 9천 명, 재판이 1600명. 학살당한 9천 명은 수복 초기에 벌어진 경우로 유대인학살 등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경우와 크게 다르다. 수복하던 국군은 여성동맹위원장 등 '장'자만 붙어도 총살하고 북진했지만 이후 경찰이 복귀하기 전까지 무차별 보복은 크게 없었다. 본격적인 학살은 경찰서 사찰계 주임의 복귀와 함께 체계적으로 시작되는데 대략 50년 10월 6일경에 시작된다.

비교사례로 가장 끔찍한 경우가 우리의 친일파 청산과정이었다. 무려 35년간의 식민지 지배를 청산하면서 청산대상은 고작 7천 명에 그쳤다. 이들이 바로 1949년 설립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이었는데 이들 중 처형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비한다면 1950년 있었던 이승만정권의 부역자 처리는 그 자체가 동족 증오에 기초한 터무니없는 대량학살 전쟁범죄였고 자기부정에 해당하는 국가범죄였다."

- 이승만 정권이 한국 민간인들에게 저지른 국가범죄가 단순하게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는지 아니면 고의성이 있다고 보는지? 
"이승만정권에 의해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체계적으로 학살당했다. 전쟁 전 국가의 물리력을 동원하여 국민을 토벌하는 폭압에도 집권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전쟁이 발생했다. 이를 예상했다는 듯이 이승만정권은 비상조치령을 공포하였고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정치범들을 순차적으로 학살하면서 낙동강전선까지 후퇴했다. 한 달 뒤 인민군의 수를 압도한 미군이 북진을 시작하자 인민군 점령지의 민간인들을 '부역자'라며 그 자리에서 학살했으며, 치안이 확보된 후에는 체계적으로 주민들을 연행하여 고문 후 특정지역에서 집단 총살했다. 같은 시기 영호남지역에서는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국군 11사단이 피난민 등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잔혹행위를 저질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전쟁 발발 직후와 수복 직전 이승만정권이 민간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결정했던 문서와 증언들을 확보했다. 이 안에는 이승만정권의 고의적인 민간인처리 계획이 들어 있었다. 후퇴하는 동안 점령군에게 협력할 것으로 보이는 민간인들을 집단수용하라는 문서를 만들어 각 기관에 발송했으며, 수복하기 직전에는 처리할 부역자 명단을 작성하는 등 대책회의를 열었다. 전선을 오르내리면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학살 사건들은 이들이 세웠던 계획의 실행을 증명하는 것이다. 완전히 의도했다는 것 외에 다른 설명이 있을까?"

"대규모 민간인학살 계획 문서들 발견... 역사적 진실 규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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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3월 다시 수복작전을 벌이던 미군에 의해 발견된 학살 장소를 촬영한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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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 혹은 '전쟁범죄'와 관련하여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유족 입장에서는 명예회복일 것이고 내 입장에서는 역사적 진실규명이다.

당장의 구체적 과제는 여전히 말 못하는 유족들의 입을 터주는 것이다. 희생자들이나 유족들의 고통을 풀어주자는 데에는 여야당 정치인들이 반대하지 않던데, 정책으로 결정할 때는 전혀 달라지는 것 같다. 그동안 진실을 은폐하면서 덕을 본 사람들이나, 그냥 그렇게 복종하면서 겨우 안정되게 살았던 유족들에게는 불편한 과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말을 못하면 병이 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공포정치 이제 그만하고 말이나 좀 하게 해줬으면 한다. 전국의 각 지역사회도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희생자나 유족들에게 너그러웠으면 한다. 어디를 가나 어느 분야에서나 이분들을 소외시키는 게 보인다.

그리고 뜬금없는 말로 들리겠지만,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가해자 입장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저런 평범한 자도 악인이 될 것 같다'가 아니라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도 저런 악인이 될 수 있겠구나'하는 성찰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심각한 과제는 인권이 존중되고 평화로운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일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정통성 있는 정부를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대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관권 금권 부정선거에 다수의 시민들이 지게 되고 그 결과 부패하거나 독재성향의 지도자가 뽑히게 되면 결국 대부분의 시민들이 위험한 지경으로 몰려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을 적으로 여긴 이승만정권의 행태가 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민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국민을 존중하는 지도자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 저자 신기철은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에 다녔으며 인천과 구로, 영등포지역 노동운동과 고양 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했다.  지금은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에서 인권평화 연구소장으로 일하면서 지난 조사자료를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 나타난 유족들을 심층면담하고 있다. 저서로는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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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 국민들 적으로 보고 대량학살"

[인터뷰①] <전쟁범죄> 펴낸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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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범죄>의 저자 신기철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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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80년대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울대학교에 당당히 합격했다. 공부를 잘했고 마음도 착했으니 그냥 조용히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서 착실히 다녔으면 지금 그는 물질적으로는 무척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온하고 안락한 삶의 길을 걷지 않았다.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그가 찾아간 곳은 번듯한 대기업이 아니라 1980년대 당시 열악한 인천, 구로, 영등포지역의 공장들이었다. 여러 공장들을 전전하며 그는 노동운동에 몸을 던졌고 그 후 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내가 신기철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였다. 내가 기억하는 신기철의 첫 인상은 참 초라했다. 옷차림과 외모가 검소와 수수 그 자체, 아무것도 꾸미지 않는 순수와 소탈 그 자체였다. 그는 달변가도 아니고 성격이 원만한 편도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조금이라도 더 그를 알아갈수록 '초라한' 겉모습 뒤에 가려져있는 '위대한 정신'과 '뜨거운 정의감'을 지닌 신기철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지난 2010년 말 진실화해위원회가 이명박정권에 의해서 '폐업처리'되었다. 정부차원의 과거사정리가 막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길거리로 나온 40대 중반의 부인과 딸 셋을 둔 '무직' 가장 신기철의 과거사정리는 이제 시작된 것이다. 그는 학자가 아니라 조용한 행동가다. 진실화해위원회를 나온 뒤 그는 들판에서 벌써 3권의 책을 썼다.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에 이어 최근 이승만정권이 한국전쟁기 저지른 민간인학살 사건 <전쟁범죄>를 발간했다. 역사학 전공자인 기자가 그의 앞에서 숙연히 머리가 숙여지는 이유다.

다음은 지난 한 달간 신기철 선생과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승만정권의 학살행위는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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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범죄> 책 표지.
ⓒ 인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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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진실화해위원회 '폐업' 뒤 3번째 저서인 <전쟁범죄>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한국전쟁기 이승만정권이 자행한 자국민에 대한 여러 민간인학살을 '전쟁범죄'로 봐야한다는 시각이 있는데, 동의하나?
"한국전쟁 전후 벌어진 민간인학살은 군경에 의한 대량학살이었다. 서구학자들은 이를 메서커(massacre)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개별사건들에게는 적당해 보이지만 한국전쟁처럼 100만 명의 다양한 희생자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많이 부족한 개념 같다.

민간인에 대해 한국전쟁의 경우 전투에 방해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잠정적인 적으로 여겼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전쟁 전 빨치산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전쟁 후에는 점령군에게 협력할 것이라거나 협력했다는 이유로 국민보도연맹사건이나 부역혐의사건이 저질러졌다. 민간인조차 아군 편과 적군 편으로 가르면서 벌어진 집단살해행위라는 점에 주목한다.

한국전쟁 전후시기 이승만정권에 의한 민간인학살을 포괄적인 전쟁범죄로 보는 데 이견은 없어 보이지만 좁은 의미에서 '반인륜범죄'와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 논란이 있을 것 같다. 생명권의 측면에서는 사소한 차이일 수도 있겠다. 하여튼 좁은 의미에서 전쟁범죄는 점령지 민간인살해를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국민에게 저지른 고문이나 학살행위를 '반인륜범죄'라고 하며, 점령지 적국민에게 저지른 집단학살행위를 '전쟁범죄'로 본다는 해석이 있다.

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승만의 자국민 학살행위를 전쟁범죄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자국민을 독가스로 집단학살한 이라크 후세인은 '반인륜범죄'로서 사형 당했다. 독재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자국민을 학살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승만의 범죄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까? 대량학살이 벌어진 사실만으로도 '반인륜범죄'를 구성한다. 하지만 나는 전쟁 당시 이승만정권이 희생자들을 자국민이라기보다 적의 국민으로 보았던 것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로 보아 이승만정권의 학살행위에는 '전쟁범죄'라는 정의가 더 적절하다고 본다.

한 가지 비교해 보고 싶은 사례는 후퇴하는 인민군 측에 의한 민간인 학살행위, 곧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이다. 국군 수복 직후부터 조사되었던 이 사례는 KWC(Korean War Crimes, 한국전쟁범죄)라는 문서로 보고되었다. 점령군인 인민군이 저지른 민간인학살 행위였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대구10월항쟁이나 제주4․3사건, 여순14연대사건, 그리고 이에 이어 10만여 명을 학살했던 영호남지역의 토벌작전 피해 역시 전쟁범죄에서 봐야 사건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8․15해방 직후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은 스스로를 '해방자'가 아닌 '점령자'로 표현하였으며, 이를 계승한 이승만정권의 입장 역시 같았던 것은 아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이승만정권이 '국민과의 전쟁'을 시작하여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평가하는 이유와 근거는?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협상 결렬을 계기로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해방 후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일본식민지를 해방시켰다기보다는 점령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친일세력을 이용하면서 일반 국민들과는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대구 10월항쟁이나 호남지역의 추수봉기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집단학살사건을 저질렀지만 이를 일반적인 방식으로까지 발전시키지는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미군정을 승계한 이승만정권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직후부터 한국전쟁발발 직전까지 민간인학살 방식을 일반화시켰다. 예를 들어 제주 4․3사건을 생각해 보면, 토벌작전과 함께 민간인 3만 명이 희생되는 시기는 사건 직후인 1948년 4월이 아니라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였다. 여순사건과도 맞물려 있지만 이 시기는 이승만 단독정부의 수립 직후였다. 

영호남지역의 토벌작전 피해 역시 같은 시기에 시작되어 1950년 초까지 진행된다. 이는 잘 주목받지 않고 있는 측면이다. 같은 시기 민간인 인명피해는 10만 명이 넘으며, 여기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전국 각 지역 형무소에 수용되었거나 국민보도연맹원이 되었고 이들은 전쟁 발발 직후 모두 학살당하게 된다.

나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성공한 이승만정권이 남북화해정책보다 적대정책을 택했으며 자신의 반대자들을 모두 적을 돕는 세력, 또는 적으로 보았다는 데에 주목하고 있다. 결국 이승만정권은 반정부 세력 탄압의 관점이 아니라 적을 제거한다는 관점에서 증오심에 가득 차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본다.

그리고 '국민과의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물리력의 정비, 곧 국군의 정비다. 전방 4개 사단을 제외한 후방 4개 사단과 지역 경찰력이 후방 토벌을 빌미로 민간인학살에 동원되었고 결국 1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 대량학살을 초래했다. 이는 국민을 적대시한 정책의 결과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제노사이드(인종 학살) 연구자들은 집단학살 발생의 가장 큰 요인으로 물리력의 준비를 들고 있다. 학살 주체와 무기가 준비되어야 제노사이드가 일어난다는 것인데, 국민이 제어하지 못하는 군대가 준비된다는 것은 이미 국민에 대한 국가범죄가 시작됨을 의미한다고 본다."

"국군의 민간인학살이 인민군 학살행위로 왜곡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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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들은 1951년 3월 다시 수복작전을 벌이던 미군에 의해 발견된 학살 장소를 촬영한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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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진실화해위원회 이영조 상임위원(나중에 위원장)은 '미군전범조사보고서'의 왜곡을 지적한 저자(당시 조사관)에게 '악의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당시 미군보고서의 어떤 점이 왜곡된 것을 지적했나? 
"양평에서는 1950년 9월 28일 후퇴하던 인민군 측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학살이 있었다. 내가 직접 인터뷰한 양평경찰서 사찰계 형사는 당시 희생자 수가 150명 정도였다고 했고, 반면 수복 당시 현장을 목격한 미군 장교는 700명이라고 보고했다.

나는 양평지역 사건을 조사하면서 미군전범조사보고서(KWC#33) 내 사진자료를 보게 되었다. 여기에는 1950년 9월 말 후퇴하는 인민군 측이 학살했다는 증거로 쓰인 사진들이 있었다. 이중 2장의 사진을 보자. 

위 사진들은 1951년 3월 다시 수복작전을 벌이던 미군에 의해 발견된 학살 장소를 촬영한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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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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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여기서 일단 눈에 띄는 점은 사망한 지 4~5개월 되었다는 미 조사관의 법의학적 소견이었다. 1951년 3월 발견했으니까 4~5개월 전이면 1950년 10~11월이 된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이 사진은 1950년 9월 28일 국군 수복 후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을 촬영한 것으로 봐야 한다.

또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자 시신은 모두 수습되었다는 증언과 정황을 주목할 수 있다. 두 번째 사진의 백골화된 시신은 발견 당시까지 노골적으로 방치되었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시신이 방치되는 경우는 대부분 1950년 9월 28일 국군 수복 후 한국 민간인이 국군에 의해 부역혐의로 총살당한 경우이며, 인민군 측에 의한 희생자의 시신이 방치된 경우는 확인된 바가 없다.

희생지역도 문제가 되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지역과 국군 수복 후 부역혐의사건 피해지역이 1km 정도 차이가 나는데, 위 시신을 발견한 지역은 인민군 측에 의한 사건지역이 아니라 국군 측에 의한 부역혐의 피해지역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이 사진의 시신들은 인민군 측에 의한 희생자가 아니라 국군 수복 후인 1950년 10월 중순경 이후 희생자로 판단된 것이다. 결국 미군 측의 사진자료는 해당 사건과 상관없는 것으로 나는 진실위 근무당시 오히려 국군 수복 후 벌어진 부역혐의사건의 일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이영조 위원장 체제의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의혹 제기 수준에서 서술하라고 결정했다."

그러면 당시 미군보고서의 왜곡을 지적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저자)에게 왜 이영조 상임위원은 '악의적'이라고 지적했다고 생각하나?   
"진실화해위원회는 3개의 조사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사1국은 항일독립운동과 인민군 측에 의한 집단희생사건, 조사2국은 (한국)군경에 의한 집단희생사건, 조사3국은 인권침해사건을 조사했다. 당시 조사1국의 조사를 총괄 지휘했던 분이 이영조 상임위원이었다.

그런데 조사1국의 인민군 측에 의한 사건의 상당부분은 이미 사건 직후에 미군과 경찰이 조사한 사건이었으므로 당시 조사보고서인 KWC조사자료가 가장 결정적인 입증자료였다. 그러니 나의 지적이 이영조 상임위원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KWC 조사자료의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린 것으로 여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여간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한다면 한 자료에서도 많은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국방부에서 조사한 증언록 역시 진실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보고 있다. 자료를 올바로 해석하자는 게 과연 '악의적'인지 여부는 독자들이 판단하리라 믿는다."

"김구 선생 지지했던 군인들, 이승만정권 아래서 전부 학살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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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형무소에서 이승만정권에 희생당한 해군 창설 멤버 전호극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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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기 형무소에 이미 갇혀있던 주요 반정부인사의 학살사례를 소개하면?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를 토대로 19개 형무소 희생자 수를 추정해 보면 적어도 2만 명을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두 전쟁 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거나 재판과정에 있던 분들이다. 학살된 분들 중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했던 분들도 많아서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아마 근현대사를 다시 정리해야 하는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집단학살사건에 있어서 반정부인사의 죽음을 따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어 보이지만 그 동안 알려져 있던 것에서 벗어나 있는 사례들이 있다. 형무소에서 희생되신 분들을 구분지어 본다면 제주4·3토벌작전에서 연행되신 분들과 여순토벌작전에서 연행되신 분들이 가장 큰 규모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인 숙청 군인들도 한 그룹이 될 수 있다.

마산형무소에서 희생당한 해군 창설 멤버 전호극 소령(1913년생)을 예로 들어보자. 전쟁 전 숙청당한 군인들 수는 장교 242명을 포함하여 4400여 명이 된다. 김구 계열인 전 소령은 1949년 2월 여순사건과 관련 있다며 연행되는데, 같은 해 6월 김구 선생의 암살 후 징역 6년형을 선고받는다. 전 소령은 같은 해 5월 6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이등병으로 강등된 후 강제 퇴역당해 민간인 신분으로 마산형무소에서 수용생활을 했다. 그런데 마산형무소에는 같은 이유로 수용당한 군인들이 4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숙청당한 군인들은 1950년 7월 초 마산과 거제 사이 괭이바다라는 곳에서 동료 해군 헌병대들에 의해 학살당한다. 결국 김구 선생을 지지했던 군인들이 이승만정권 아래서 전부 학살당한 것이다. 

전쟁 직전 국군의 수가 9만 8천 명이었으니 숙청당한 군의 규모가 무척 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승화 장군 등의 수기를 보면 당시 용감하고 실력 있는 군인들이 숙청당해 안타까워하는 내용을 종종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이 한국전쟁 초기 왜 국군이 그렇게 일찍 붕괴되었는지 설명해 주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그 대표적 사례가 전호극 소령이라고 생각한다."

- 인민군 후퇴시기 민간인학살과 관련하여 진실이 왜곡된 사례가 있었는가?
"경찰의 공격으로 희생당한 영광 오길종 일가족 3명이 좌익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된 경우는 진실이 완전히 왜곡된 사례라고 하겠지만 이렇게 명확히 확인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내가 진실위에서 조사한 민간인학살사건 대부분의 경우는 기본적인 진실조차 규명되지 않았다. 여러 제약으로 정부 측 기록에서 확인되는 의문점을 지적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것이 인민군 후퇴시기의 학살명령이다. 인민군 측에 의한 학살 중 84.6%가 1950년 9월 26~30일 사이에 벌어졌으니 조직적인 명령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조차도 당시 순차적으로 수복되는 전황을 보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수복 후나 같은 시기에 발생하는 사건들이 많다.

하여튼 약간 차이가 있지만 국방부나 진보 학자집단 모두 인민군의 학살명령이 있었다는데 견해가 일치된다. 하지만 나는 양쪽 다 주장의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특히 국방부나 검찰은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책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그 근거로 체포된 군산(당시 옥구군) 미면 신관리 인민위원장의 자백을 들고 있다. 문서 한 장 남은 것이 없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그 시기 전국의 희생사건을 일개 리 인민위원장의 자백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게다가 군산에서 사건이 발생하던 1950년 9월 28일 서울 영등포에서 체포된 이 인민위원장은 재판 출석자 명단에서는 다른 10여 명과 함께 사라진다. 나는 이미 부역혐의로 학살당한 뒤였기 때문에 생긴 현상으로 추정한다. 갖은 고문이 횡행하던 시대였고 재판도 받기 전에 처형이 이루어진 시대의 자백, 그 조차 입증자료도 없고. 이걸 믿는 것이 과연 상식적일까?" 

☞ 인터뷰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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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여 명 학살당한 땅... 대전 산내의 뼈아픈 역사

대전 시민들 유해발굴 나선 이곳... 땅속 '진실' 드러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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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내 골령골 암매장지 현장에서 드러나 나뒹글고 있는 '사람의 뼈' .정부와 관할 자치단체는 유해훼손이 계속되고 있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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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산내골령골에는 희생자 유해가 어느 정도 매장돼 있을까? 이달 말 예정된 발굴지에서는 유해발굴이 가능할까? 

시민사회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암매장지 중 하나인 대전 산내골령골에 대한 유해발굴 계획을 밝힘에 따라 이곳에 암매장된 희생자 규모 및 발굴 가능성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지역 18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대책위'(18개 단체, 상임대표 김용우)는 4일 오후 2시 대전시청에서 발족 기자회견을 열고 오는 23일부터 7일동안 예정된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한 전국 조직인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7개 단체, 공동대표 김수업·박선주·장주영·김형태·이석태·함세웅·신미자·김종현·김용우)이 유해발굴을 자처하자 대전시민단체에서 이를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관련 기사 : 대전시민들, 산내 민간인 학살지 유해발굴 나선다).

군경, 세 차례 걸쳐 민간인 7000여 명 집단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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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사와 각종 개발행위로 훼손되고 있는 민간인 희생자로 추정되는 유해. 하지만 정부와 관할자치단체인 대전시와 동구청은 유해훼손도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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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산내 골령골은 전쟁이 터진 1950년 6월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대전형무소 재소자 등과 대전 충남·북 일원의 보도연맹원 등 약 7000여 명이 군경에 의해 집단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정부 기구였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첫 학살은 6월 28일 시작돼 사흘간 자행됐다. 미 CIC(육군 방첩대) 파견대는 전투일지에 희생자 규모를 1400명으로 적어놨다. 주로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인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신뢰할 만한 정보통의 1950년 7월 1일 보고에 따르면 한국 정부의 지시에 의해, 대전과 그 인근에서 공산주의 단체 가입 및 활동으로 체포됐던 민간인 1400명이 경찰에 의해 살해됐다. 이들의 시신은 대전에서 약 4km 떨어진 산에 매장됐다."(미 제 25사단 CIC 파견대의 전투일지 활동보고서 중에서)

2차 학살은 같은 해 7월 3일부터 사흘 동안 이뤄졌다. 희생자 규모는 약 1800명에서 20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1950년 9월 23일,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무관 에드워드 중령은 워싱턴의 미 육군 정보부로 사진 18장과 함께 '한국에서 정치범 처형'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보냈다. 이 보고서는 당시 대전형무소 집단학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적어놨다. 

"서울이 함락되고 난 뒤, 형무소의 재소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석방될 가능성을 방지하고자 수천 명의 정치범들을 몇 주 동안 처형한 것으로 우리는 믿고 있다. (중략) 이러한 처형 명령은 의심할 여지없이 최고위층에서 내려온 것이다. 대전에서 벌어진 1800여 명의 정치범 집단학살은 3일 간에 걸쳐 이뤄졌으며, 1950년 7월 첫째 주에 자행됐다."


<런던 옵서버> "남한 경찰이 트럭에 겹겹이 싣고 와 숲에서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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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0년 7월. 진실화해위원회가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희생자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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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학살은 같은 해 7월 6일 무렵부터 7월 17일 새벽 사이 벌어졌다. 이 기간은 육군형무소 병력이 대전형무소에 임시 주둔하던 때였다. 

1950년 <런던 옵서버>지 기자로 한국에 왔다가 북한군의 포로가 된 필립 딘은 <나는 한국에서 포로였다>에서 "미군이 대전에서 철수하기 직전 남한 경찰이 1700명의 재소자들을 트럭에 겹겹이 싣고 와 내가 있던 교회 부근 숲에서 처형했다"는 프랑스 신부 카다르(당시 72세)의 증언을 전했다. 

영국 일간신문 <데일리 워커>의 편집자이자 특파원인 위닝턴 기자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에서 "7월 16일 인민군이 미군의 금강 전선을 돌파하자, 남아 있는 정치범들에 대한 학살이 (또다시) 시작됐다, 이날 무수한 여자들을 포함해 적어도 각각 100명씩 트럭 37대, 3700여 명이 죽었다"라고 썼다. 3차 시기에만 1700명 또는 3700이 학살됐다는 증언이 나뉘어지고 있다. 

하지만 3차 학살 희생자를 1700명으로 추정하더라도 1차 1400명(6월 말 삼일), 2차(7월 첫 주 삼일) 희생규모는 20일 동안 4900명에 이른다.

나머지 희생자들은 북한군에 대한 '부역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었다.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군경은 부역자 색출에 나섰다. 대전과 충남 일원에서 9월 28일부터 11월 13일까지 충남경찰국에서 검거한 부역자 수는 1만1992명에 이르렀다(1950년 11월 15일 내무부가 밝힌 내용). 검거된 부역자는 군법회의를 거쳐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대전형무소에서는 열악한 수용시설에 식량과 의약품마저 부족하자 곳곳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는 재소자가 속출했다. 처형된 사람들도 많았다. 기록에 의하면 헌병대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은 1951년 1월 17일 하루에만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사형수 166명을 대전 산내 골령골로 끌고 가 처형했다. 

민간단체, 유해발굴 자원봉사... 땅속 진실 드러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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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산내골령골 집단학살 희생자 암매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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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산내 골령골 일부 유해를 발굴했지만 소규모 매장추정지 외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민간단체 주도의 유해발굴에서도 어느 정도의 유해가 드러날 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우선 발굴 예정지가 극히 제한적이다.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측은 여러 물리적 조건 상 매장추정지 중 100여 평에 한해 유해발굴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발굴 예정지는 수십 년 동안 농사를 짓고 있는 밭이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오랫동안 농사와 개발행위로 대부분 유해가 유실됐을 가능성이 크다"라면서 "유해가 남아 있는지 조차 가늠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유해매장 추정지 전체에 대한 유해발굴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유해발굴과 유해매장지 보존을 위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대책을 요구했다. 

"정부는 하루속히 정부 기구를 마련해 체계적인 계획 하에 과학적인 유해발굴 작업에 나서야 합니다. 대전시는 다른 자치단체처럼 희생자의 원혼과 유가족들의 한을 달랠 수 있도록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 지원을 위한 조례제정에 나서 주십시오. 관할 동구청은 유해매장지가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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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계시지요?


'한국전쟁'이 터졌을때..

수도 서울을 버리고 제일 먼저 도망간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지요


뿐만 아니라 1950년 6월 28일..

피난민으로 가득찬 한강 다리 폭파 명령을 내린 사람도 바로 "이승만"이지요


아비규환, 당시 한강 다리 위에 몇명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게는 500명, 많게는 1500명이 폭파로 끊어진 다리 위에서 비참하고 억울하게 죽어 갔습니다..


'짐승'이 "인간"을 학살한 것입니다



(한겨레 / 5월 26일 / 한홍구 교수 기고 / "세월호의 악마들, 대한민국의 악마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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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김동춘/사계절출판사/2013)



"학살,고문 같은 가공할 만한 '국가폭력'은 피해자에게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큰 상처를 남긴다


학살은 단순히 사람의 생명권을 박탈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남은 가족들의 삶의 기반마저 송두리째 파괴하고,


인간으로서의 자존감과 삶의 의지를 박탈한다


'국가가 저지르는 범죄'는 학살과 인권침해의 피해 당사자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의


건강한 의식과 사회 참여 의지를 마비시키고 위축시킨다"



(저자 서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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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굴인권평화재단  http://www.gjpeac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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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굴 학살’ 유족들 ‘인권평화재단’ 만든다



피해보상금 모아 설립…5월 창립대회
“비극 재발 않도록 인권의식 높일 것”
평화공원 조성·위령제 등 활동 계획

경기도 고양시 금정굴 민간인 학살사건 희생자 유족들이 지난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이겨 받은 보상금 일부를 출연해 ‘금정굴 인권평화재단’을 만든다. 한국전쟁 희생자 유족들이 기금을 조성해 인권평화재단을 발족하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양금정굴유족회는 지난 9일 유족 93명이 참여해 ‘(가칭)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발기인대회’를 연 데 이어 5월에 창립대회를 열 예정이라고 12일 밝혔다.


발기인대회에서는 유족과 시민사회 대표 각 9명씩 18명으로 이사회를 꾸리고, 초대 이사장에 이이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상임대표를, 상임이사에 마임순 금정굴유족회장을 내정했다.


재단 설립금은 유족 93명이 받은 피해보상금의 5%인 6억2000만원과 지연이자 4억원을 합해 모두 10억2000만원 규모라고 유족회는 밝혔다. 마임순 금정굴유족회장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피해보상금을 인권과 평화증진을 위해 사용하자고 유족들이 십시일반으로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은 △평화공원 및 사료관 조성과 운영 △희생자 추가조사와 유골 발굴 지원 △위령제 등 추모문화행사 개최 △평화·인권에 대한 연구·학술활동 지원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예방 및 감시 △한국전쟁 희생자 자료 발굴 수집과 조사 연구 등을 추진하게 된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은 재단 산하에 인권평화연구소를 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추가 조사와 유해발굴·수습방안 연구, 국내외 학술대회, 자료집 발간 등을 맡기기로 했다.


신기철 금정굴평화재단 운영위원장은 “금정굴 평화재단은 다시는 이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우리 사회 전반의 인권의식을 높이고, 과거사기본법 정신에 바탕해 공익법인 성격으로 운영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양 금정굴 사건은 한국전쟁 때 국군이 서울을 되찾고 북진하던 1950년 10월 고양경찰서장 지휘로 경찰과 치안대, 태극단 등 우익단체 회원이 북한에 부역한 혐의자와 가족을 집단살해해 금정굴에 매장한 사건이다. 1995년 유족들이 희생자 유해 153구를 발굴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진실규명 결정을 하며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 위령시설 설치 등 신속한 후속조처를 권고했다. 법원은 지난해 8월 유족들이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정당한 이유와 절차 없이 구금해 부역 혐의로 살해했다. 국가는 불법행위의 책임을 지고 유가족들에게 124억원을 지급하라’고 확정판결했다.


박경만 기자 mania@hani.co.kr



한겨레 / 2013. 3. 12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5778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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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와 망각의 역사에 저항하는 예술

전승일 (독립애니메이션 감독)


                   ▲ <오래된 추방> (전승일作_무한반복 애니메이션_2009)


제노사이드의 개념화와 유엔 협약

흔히 ‘국가권력(혹은 그에 준하는 권력체의 대리집단)이 특정 집단구성원을 절멸할 의도를 갖고 체계적인 계획 속에서 실행한 집단학살’로 정의되는 ‘제노사이드(Genocide)’는 인종이나 종족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genos와 살인을 의미하는 라틴어 cide를 결합하여 만든 합성어로, 폴란드 출신 법학자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에 의해 1943년 처음으로 개념화되었다.

이어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를 목도한 렘킨은, 제노사이드는 “어떤 집단을 절멸할 목적에서 그 집단 구성원들의 생활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토대들을 파괴하기 위해 기도되는 다양한 행위들로 이루어진 공조 가능한 계획”을 뜻하며, 제노사이드의 목표는 “한 집단의 정치 제도와 사회 제도ㆍ문화ㆍ언어ㆍ민족 감정ㆍ종교ㆍ경제적 생존 기반을 해체하고, 개인적 안전ㆍ자유ㆍ건강ㆍ존엄성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의 생명까지 파괴”하는데 있다고 포괄적으로 규정하였다.

유엔과 국제사회 속에서 제노사이드 범죄의 반인도성을 확인하고, 그 범죄를 명령하고 집행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범죄를 조장하는 ‘철학’을 수립하고 가르친 사람까지 처벌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를 마련하여, 제노사이드를 자행한 나라에 대해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집단책임까지도 물어야 한다는 렘킨의 제안과 주장은 1946년 유엔 총회에서 의제로 상정되었고, 결국 “정치적ㆍ종교적ㆍ인종적 혹은 어떤 다른 이유”에서 자행된 제노사이드 범죄를 비로소 국제법상의 범죄로 공인하는 인류 최초의 유엔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1948년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1946년의 제노사이드 결의안을 바탕으로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이 92개국의 찬성으로 공식 채택되었다.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은 “① 집단 구성원을 살해하는 것, ② 집단 구성원에 대해 중대한 육체적ㆍ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등을 제노사이드 범죄 행위라고 적시하고, ‘제노사이드 범죄를 저지른 자ㆍ공모한 자ㆍ교사한 자ㆍ미수자ㆍ공범자’ 등을 처벌 대상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1948년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1946년의 제노사이드 결의안을 바탕으로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이 92개국의 찬성으로 공식 채택되었다.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은 “① 집단 구성원을 살해하는 것, ② 집단 구성원에 대해 중대한 육체적ㆍ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등을 제노사이드 범죄 행위라고 적시하고, ‘제노사이드 범죄를 저지른 자ㆍ공모한 자ㆍ교사한 자ㆍ미수자ㆍ공범자’ 등을 처벌 대상으로 규정하였다.


                                       국제 제노사이드 방지협회 웹사이트 (www.preventgenocide.org)



1948년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의 정신은 20세기 들어서 유난히 거세게 일기 시작한 집단학살의 야만적 물결을, 인류의 이름으로 이성의 보편적 가치와 기준에 따라 저지함으로써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자는 것이다. 2005년 기준,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을 비준한 국가는 모두 137개국이며, 인도네시아ㆍ나이지리아ㆍ일본 등 50개 국가는 아직도 협약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미국의 경우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이 채택된 후 무려 38년이 지난 1986년에 이르러서야 비준되었다.


은폐와 망각의 역사, 코리안 제노사이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한국 정부ㆍ미군에 의한 학살이 좌익보다 10배는 많다.”

솟대 오토마타 제작을 위해 2D 애니메이션으로 미리 만들어 본 필자 작품 <오래된 추방> 속의 신문 기사(2006. 6. 23_경향신문)이다. 무한반복 애니메이션 <오래된 추방>은 크랭크 방식으로 작동하는 오토마타를 위한 사전 작품으로, 추후 연재될 예정인 <예산족 애니메이션 프로젝트>(2008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사전제작지원작)>와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한국전쟁전후 한반도 남단에서는 무려 100만여 명의 민간인들이 무고하게 학살당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90%는 대한민국 국군ㆍ경찰ㆍ우익단체 그리고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불법적인 집단학살이었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보도연맹과 예비검속 학살 30만여 명, 형무소 수감자 학살 4∼5만 명, 유격대 토벌 관련 10만여 명, 부역자 색출 과정 희생자 10∼20만 명, 미군 폭격 희생자 10만여 명, 인민군과 좌익단체에 의한 학살 10만여 명 등이다.

2007년 말 기준으로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는 무려 7,775건의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 진실규명 신청되었는데, 이 가운데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19건(신청건수 903건 병합)에 불과하다.



용산참사 게릴라 기획전 <망루전(亡淚戰)> (2009. 3. 11∼4. 28_평화박물관)
(왼쪽부터 성낙중ㆍ배인석ㆍ전미영 공동作 / 이윤엽作 / 나규환作)


독일의 전 대통령 바이츠체커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에 대해서도 맹목이 되어 버린다. 과거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새로운 감염의 위협에 노출된다.”

불행히도 코리안 제노사이드는 2009년 1월 ‘용산’에서 다시 자행되었다. 그리고 망자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하고, 은폐와 망각의 역사에 저항하는 예술인들의 노력은 미술ㆍ연극ㆍ만화ㆍ음악ㆍ문학ㆍ공연ㆍ영상 등 다양한 장르에서 현재 계속 이어지고 있다.



컬처뉴스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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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발굴된 수백구의 희생자 유해_2007년 9월 20일





 

코리안 제노사이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영상보고展


2007_1201 ▶ 2007_1207



 

책임기획_전승일
참여작가_이대영_김병희_김진주


현장전시_2007 한국전쟁전후 백만 민간인학살 피학살자 전국합동위령제
2007_1210_관람시간_02:00pm~05:00 pm
조계사 한국불교역사기념관

스페이스 빔
인천시 동구 창영동 7번지
Tel. 032_422_8630
www.spacebeam.net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발굴된 희생자 유해의 일부_2007년 9월 20일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하나의 개체로 발굴된 유해_2007년 9월 20일






경산 코발트광산 유해발굴현장에서 진실규명을 외치는 유족_2007년 9월 20일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발굴된 수백개의 희생자 치아_2007년 9월 20일





고양 금정굴에서 발굴된 여성 희생자들의 머리카락_2007년 10월 9일






고양 금정굴에서 발굴된 포승줄로 사용된 군용 삐삐선_2007년 10월 9일






고양 금정굴에서 발굴된 탄피_2007년 10월 9일






서울의대에 13년째 임시 보관중인 금정굴학살 희생자 유해_2007년 10월 9일






서울의대 유골보관소를 찾아 묵념하는 유족들_2007년 10월 9일






고양 금정굴 학살사건 희생자 진혼제에서 오열하는 유족_2007년 6월 27일


본 프로젝트는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새장르공공예술 부문 지원사업으로
2006년 9월 고양 금정굴 민간인학살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대한 영상기록으로 시작되었으며,

2007년 한 해 동안 괴산 사리면 보도연맹사건, 문경 석달동 집단학살사건, 청주 청원 보도연맹사건, 산청 시천면 학살사건, 고창 양민희생사건, 강화도 민간인학살사건, 나주 봉황 학살사건, 공주형무소사건, 익산 미군폭격사건, 대전 산내 집단학살사건, 인천 월미도 네이팜탄 미군폭격사건, 경산 코발트광산 집단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등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였다.

또한 올해는 민간인학살사건이 벌어진지 57년 만에 처음으로
국가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차원으로 희생자 유해발굴 사업이 공식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에 본 프로젝트는 경산 코발트광산 유해발굴현장과 대전 산내 유해발굴현장을 영상기록 하였다.

이번 코리안 제노사이드 첫 번째 전시회에서는
2006년 9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촬영된 희생자 합동위령제 및 유해발굴현장 가운데 주요한 영상을 간추려서 전시하며, 전시기간 동안 홈페이지를 통한 온라인 전시와 프로젝트 보고서 발간을 통해 1차 결과물을 정리하게 된다.



전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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