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애니메이션 파트"를 맡고 있는


부산형제복지원 사건 '다큐영화' <살아남은 아이들>(감독: 전상진)에


관심과 참여 부탁드려요~^




다큐멘터리 피칭 포럼 2013


http://www.funding21.com/event/docu/








Posted by 미메시스 미메시스TV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한종선씨는 잘 웃었다. 형제복지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웃었고, 사진 촬영을 하면서도 웃었다. “마음이 아프다고 오만상을 써가면서 이야기하면 아무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 얘기 잘 믿어주지도 않을 테니, 이왕 얘기하는 거 듣고 싶게, 재미있게 하자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한씨 속에 있는 상처투성이의 여덟살 꼬마는 간절하게 말한다. ‘들어주세요, 우리 얘기 들어주세요, 어두운 곳에 갇혀 있는 우리를 봐주세요.’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토요판/커버스토리]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씨 인터뷰

형제복지원 사건 생존자 한종선
26년만에 국가의 책임을 묻는다

▶ 한종선씨는 올해 대전, 부산, 전라도 등 전국을 다녔습니다. 언론을 통해 형제복지원 사건을 듣고 연락 온 피해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날 때마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 있구나. 나 혼자만 살아남은 게 아니구나’ 싶어서요. 그는 오늘도 대책위(02-794-0395)에서 피해자들을 기다립니다. 작은 후원으로도 대책위를 도울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752602-04-194222/여준민·형제복지원)

‘너무 오래된 사건을 가지고 나와 죄송합니다.’

2012년 5월께 한종선(37)씨는 직접 쓴 손팻말을 들고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섰다. 25년 전 자신이 겪은 부산 형제복지원 인권침해의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 전부터 국가인권위원회, 언론사, 인권단체 등의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오는 말은 ‘공소시효가 끝났다’였다. 고민하던 한씨는 결국 스스로 말하기 시작했다.

형제복지원은 1987년 당시 3164명을 수용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아 시설이었다. 불법감금·폭행·강제노역 등 인권침해로 그때까지 12년간 51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건 원장이었던 박인근씨가 불법감금과 국가보조금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1987년 1월. 그러나 비슷한 시기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달리, 반짝 주목받고 사라졌다. 경찰과 검찰은 형제복지원 인권침해를 수사하지 않았고, 법원은 박 원장의 형량을 계속 줄여줬다. 같은 해 6월30일 복지원 폐쇄로 뿔뿔이 흩어진 피해자들은 ‘부랑자’라는 낙인과 공포의 기억 속에 입을 닫았다.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씨가 다시 말하기 전까지 아무도 이 사건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작은누나는 형제복지원에서 병을 얻어 지금까지 정신병원에 있다. 자신은 세번 감옥살이를 했다. 그 뒤 일하다 허리를 다쳐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가족의 불행을 아버지와 운명 탓으로 돌렸던 그는 이제 그 책임을 형제복지원과 국가에 묻고 있다.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지난달 27일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이 사건과 관련한 첫 대책위다. “26년 전 사건을 왜 이제 다시 말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한씨는 반문한다. “왜 26년이나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느냐”고.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8살 때인 1984년 10월16일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다. 그전에는 어떻게 살았나?

“아버지와 큰누나, 작은누나 넷이서 부산에서 살았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없다. 아버지는 구두를 닦았다. 집 근처에 부산역, 용두산공원, 영도다리, 자갈치시장이 있었다. 학교 끝나면 작은누나랑 만날 놀러 갔다. 누나는 꽃반지 만들고 나는 지렁이 잡고…. 유일하게 내게 남은 따뜻한 추억이다.”

-형제복지원에 어떻게 갔나?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간식과 옷을 사주고 이소룡이 나오는 영화도 보여줬다. 웬일인가 싶어 마냥 좋아했다. 그러고는 나와 작은누나를 파출소로 데려가서 기다리라고 하고 나갔는데, 웬 검은색 지프 같은 차가 와서 우리를 실어 갔다.”

톰 크루즈가 말했다, 꿈만 꾸면 계속 인질이 된다고

형제복지원의 뿌리는 박인근(83) 원장이 1960년 설립한 ‘형제육아원’이다. 1979년 법인 명칭을 바꾼 뒤, 전국 최대 부랑아 시설로 성장했다. 그 배경에는 박정희 정권의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 지침’인 1975년 12월15일자 내무부 훈령 410호와 복지국가 건설, 사회정의 구현을 내세운 전두환 정권의 ‘부랑인 정화 사업’이 있었다. 전자에 따라 경찰과 지방자치단체가 합동으로 부랑인 단속·강제 구금을 시작했고, 후자는 이를 더 강화시켰다.

도시 미관, 범죄 예방이란 명목으로 부랑인들은 국가권력에 의해 각종 시설에 강제 수용됐다. 1987년 2월4일 발표된 ‘신민당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1986년 형제복지원 수용자 3975명 중 경찰이 수용 의뢰한 사람이 3117명이었다. 당시 경찰 내부 근무 평점이 구류자 1명당 2~3점이지만 형제원 입소는 1명당 5점이었던 시절이었다. 밖에서 놀고 있다가, 퇴근하다가, 차가 끊겨서 부산역 대합실에 있다가, 가출했다가 다짜고짜 잡혀온 피해자들의 증언이 잇따랐다.

한종선씨(가운데)의 아버지(왼쪽)와 작은누나는 경북 구미의 한 정신병원에 있다. 엄마처럼 한씨를 돌봤던 작은누나는 ‘내 동생은 여덟살인데’ 하며 한씨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 세 사람이 가족이란 사실을 아는 건 한씨뿐이다. 올해 병원에서 찍은 이 사진이 그가 가진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한종선씨 제공

내내 구타와 기합의 기억…12년간 사망자 513명

-이상한 느낌이 들었나?

“차에 태우려고 하니까 작은누나(당시 11살)가 ‘집에 갈 거다’라며 울었고 나도 덩달아 울다가 맞았다. 충격에 정신 줄을 놓은 채 주위를 둘러보니 나와 비슷한 아이들이 있었다. 복지원에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었는데, 옷을 팬티까지 다 벗으라더니 신체검사를 했다.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는데, 우리를 불러 소대로 데려갔다.”

형제복지원은 군대식 조직이었다. 수용자들은 1~28소대에 분산 수용돼 집단생활을 했다. 소대마다 소대장 1명, 총무 1명, 조장 4명씩이 있었는데 모두 수용자들이었다. 수용자는 모두 군인처럼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파란색 추리닝을 입고 지냈다. 아이들도 예외는 없었다. 3164명 중 1~18살의 아동은 915명이었고, 아동소대도 따로 있었다.

-소대로 가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누나와 같이 있어 위안이 됐는데, 누나는 23소대로 나는 24소대로 찢어졌다. 무서웠다. 그때까지 누나가 계속 옆에서 엄마처럼 지켜줬는데….”

-그곳의 일상은?

“매일 새벽 4시에 불침번이 ‘기상’ 하고 침대를 치면 일어난다. 이불 정리하고 4열 종대로 앉아 자체 점호를 한다. 탈출했나 안 했나 확인하는 거다. 점호 뒤 세면장 가서 4열 종대로 앉아 씻는다. 소금 받아 손가락으로 양치질을 하고 조장들이 물 세 바가지 부어주면 그걸로 입 헹구고 얼굴 씻고 바로 튀어나갔다. 10초도 안 걸렸다. 24소대가 많을 때는 123명, 적게는 84명이 있었는데 20~30분 안에 딱 끝난다. 씻고 나서 4열 종대로 있다가 중대장 원생이 오면 또 점호를 받는다. 점호가 끝나면 4시30분인데 아침 식사시간인 6시까지 한 시간 반 정도 운동장에 나가 군가나 찬송가를 부르며 뛴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같은.”

-식사는 어땠나?

“꽁보리밥, 전어젓, 깍두기, ‘똥국’이라고 불렀던 시래기 된장국이 매일 나왔다. 어쩌다 감자 부스러기나 고기는 없는 소고깃국이 나왔다. 조장은 식사시간 때마다 (밥을 빨리 먹는) ‘선착순 몇 명’을 외쳤다. 선착순 숫자는 조장 마음이다. 오늘은 왠지 타작하고 싶다고 하면 선착순 10명, 기분 좋으면 50명 할 때도 있다. 그 안에 안 들면 맞는 거다. 두들겨 맞지 않으려고 밥 세네숟갈 먹고 뛰어나간다. 아침, 점심, 저녁 다 그랬다. 식사시간에 안 맞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복지원에서 언제부터 맞았나?

“이틀째부터 맞았다. 나는 키가 작아 소대에서 1번이었다. 조장이 “번호”라고 말하면 1번이 맨 왼쪽에 서서 “1번”을 외쳐야 다음 사람이 2번, 3번 한다. 그걸 제대로 못해서 맞았다. 그때 나는 한글도 숫자도 잘 몰랐다. 복지원 안에 개금분교가 있었지만, 학교 다닌 기억보다 소대에서 맞은 기억이 더 많다. 한번 ‘줄빳다’ 맞으면 기본 5대씩 맞는다고 치면 된다. 소대 안에 있는 시간 내내 구타와 기합이 반복됐다. 24시간 중 깨어 있는 시간은 항상 맞았다.”

-누가, 왜 그렇게 때렸나?

“소대장이나 조장이 그랬다. 그들도 수용자였다. 자기들이 제대로 안 때리면 일반 소대원으로 강등될까봐 더 심하게 굴었다. 때리는 데 이유가 없다. 기상 1분 늦게 했다고 맞고, 제대로 안 서 있다고 맞고, 기분 나쁘다고 맞고…. 내가 있던 소대 중대장은 어른이었지만 조장은 열세살 정도밖에 안 됐다. 그 어린애들이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공간에서 사람을 마구 때리다 보면 이성을 잃기 십상이었다. 어리든 나이가 많든 상관없이 똑같이 맞았다. 24소대에는 여섯살 애도 있었고, 열살부터 있었던 27소대에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고등학생이 있었다. 이불에 싸서 때리는 이불 말이, 그냥 마구 때리는 타작, 물구나무서는 히로시마, 원산폭격 등 구타와 기합이 수도 없었다. 이성뿐 아니라 동성 간의 성폭행도 만연했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게 뭔지도 모르고 안에서 비일비재하니까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열한살이었던 작은누나와 
여덟살 때 형제복지원에 갔다 
깨어있는 시간 동안 계속 맞았고 
죽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살아남고 싶었다

작은누나는 점점 이상해졌고 
아버지마저 형제복지원에 수용 
1987년 6월 복지원 폐쇄로 
소식 끊긴 아버지·누나를 
20년 만에 정신병원에서 만났다

-그렇게 맞다 죽는 사람도 있었나?

“맞다가 병원에 실려간 뒤 돌아오지 않으면 죽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은 소대 총원에서도 슬그머니 사라진다. 그러나 죽음도 금세 잊을 수밖에 없었다. 복지원 안에서 죽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다음은 내 차례일 수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그래서 배고프면 벌레도 잡아먹고 흙을 쿠키처럼 딱딱하게 말려 먹기도 했다.”

신민당 진상조사단이 형제복지원 내부자료를 분석하니 1975~1986년 사망자가 513명이었다. 그중 한명이 1986년 8월 반항했다며 맞다 숨진 김계원씨다. 형제복지원은 그가 죽자 ‘신경쇠약으로 인한 신부전증’이라는 허위 사망진단서를 발급받고 매장했다. 수용자들은 “사체가 병원에 실험용으로 팔려간다”고 주장했다. 당시 언론은 형제복지원을 사설수용소군도, 아오지 탄광, 살상원이라고 불렀다.

지렁이가 꿈틀대지 않는 경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누나를 보는 게 제일 힘들었다. 누나는 만날 나를 보러 소대를 이탈했다가 두들겨 맞았다. 같은 소대에 있던 누나들 말로는 말 안 듣는다고 많이 맞고 성적 학대도 있었다고 했다. 누나는 점점 이상해졌다. ‘시간또라이’라는 정신분열 환자가 돼 정신이상자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손이 묶인 채 항상 누워 있었다.”

-저항하거나 도망치고 싶지 않았나?

“지렁이가 밟으면 왜 꿈틀대는지 아나? 확실하게 안 밟아서 그렇다. 완전히 죽을 정도로 확 밟으면 꿈틀댈 힘도 없다. 복지원에서의 폭력이 그랬다. 꿈틀댈 수 없을 정도로 밟아댔기 때문에 감히 덤빌 수가 없었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망갔다 잡혀오는 사람들이 반신불수 되는 걸 보고 꿈도 못 꿨다. 신고? 안에 갇혀 있는데 어떻게 하나. 유일한 희망은 아버지가 찾아와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왜 데리러 오지 않았나?

“아버지가 1986년 복지원에 왔다. ‘우리 데리고 나가려고 온 거야?’라고 들뜬 마음으로 물었는데 잡혀왔다고 하더라.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는데 도리어 잡혀 들어온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우리 가족을 박살낸 아버지를 다시 만나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한이 생겼다. 그렇게 복지원에서 마지막으로 본 뒤 아버지가 ‘좀 이상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용원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 검사(현 법무법인 한별 대표변호사)는 우연히 형제복지원의 강제노역 현장을 목격하고 수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은 거물이었다. 그는 1981년 4월 국민포장, 1985년 5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데다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이었다. 예상대로 수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박 원장 구속 다음날 부산시장이 ‘빨리 석방해야 한다’고 전화를 했다. 복지원 수용자 전원을 대상으로 구타 등 가혹행위, 강제노역 여부 등을 조사하러 울산 경찰관 30명을 보냈지만 부산지검 차장검사의 지시로 철수했다. 수사를 못하게 하니 내가 밝혀낼 수 있던 건 정부 보조금 횡령이었다. 그렇게 85~86년에 박 원장이 횡령한 11억4254만원을 찾아냈지만, 이마저도 검찰 상부의 지시로 6억8178만원으로 축소해야 했다.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데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형제복지원 사건이 동시에 터져 부담을 느꼈던 전두환 정권 차원에서 이 사건을 묻으려 했었다.” 김 변호사가 말했다.

그는 업무상 횡령, 특수 감금 등을 적용해 박인근 원장 등에게 징역 15년, 벌금 6억8178만원을 구형했다. 당시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원은 불법 감금 등을 인정하고, 징역 10년에 벌금 6억8178만원을 선고했다. 형량과 혐의는 계속 줄어들었다. 대구고등법원은 징역 4년, 벌금 없음을 선고했고 대법원은 이보다 낮은 2년6개월형을 확정했다. 게다가 대법원은 “법령에 근거한 정당한 직무수행”이라며 특수 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대법관 중의 한명이 헌법재판소 소장을 지낸 김용준 전 국무총리 후보자다.

2년간의 수사와 재판이 형제복지원의 실체를 밝히지 못한 사이, 1987년 6월30일 형제복지원은 폐쇄됐다. 수용자들은 무방비 상태로 사회로 나가거나 또 다른 시설로 옮겨가야 했다.

아들·동생 못 알아보는 아버지와 누나

-1987년 당시 안의 분위기는?

“경찰차가 왔다갔다하고 폐쇄된다는 소문이 드니까 ‘드디어 풀려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녀님들이 와서 내 이름을 부르더니 버스에 타라고 했다. ‘아버지랑 누나도 여기 있다’고 했는데 일단 타라고 했다. 그렇게 두 사람과 연락이 끊겼다. 버스를 타고 간 곳은 서울에 있는 ‘소년의 집’이었다. 밥도 배부르게 먹고 맞지도 않는 그곳은 천국이었다. 그런데도 스무번이 넘게 아버지와 누나를 찾겠다며 도망을 쳤다.”

-소년의 집에 언제까지 있었나?

“1992년쯤 나왔다. 열여섯살이 됐는데도 초등학교 졸업을 못하고 있으니 수녀님이 취업해서 아버지를 찾으라고 했다. 그래서 자격증 따고 경기도 성남에 있는 공장에 취업했다.”

-사회생활은 어땠나?

“소년의 집에서 같이 취업했던 애가 차털이하다 걸려 도망을 쳤다. 사장이 그때부터 ‘거기서 나온 애들은 다 똑같은 도둑놈’이라며 색안경을 끼고 손찌검을 했다. 마침 아는 형이 서울에 있는 구두공장을 소개해줘 그곳으로 옮겼다. 월급 35만원을 받고, 그중 30만원을 사장님 이름으로 된 통장에 넣었다. 그러다 1997년 외환위기 터지기 전에 가족을 찾으러 간다고 사장에게 그동안 모은 돈을 달라고 하니 ‘네 돈이 어딨어? 자꾸 여기서 이러면 파출소에 신고해서 복지원 같은 곳에 처넣으라고 한다’고 했다. 10만원 받고 나와서 빈 창고나 옥상에서 지내다가 돈 떨어질 때쯤 동네 불량배들을 알게 됐다. 불량배 생활을 하다 절도한 것 때문에 8개월, 1년, 1년6개월 세번 감옥에 갔다.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었지만 복지시설에 있다 갑자기 사회에 나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몰랐고, 사회도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원망이 컸을 것 같다.

“그래도 어긋나지 않고 정신 차린 건 네살 많은 큰누나 덕분이었다. 어렸을 때 친척집으로 간 큰누나를 1998년 다시 만났다. 큰누나가 세번째 감옥 갔을 때 면회를 왔는데 말도 없이 실망한 눈빛으로 나를 보기만 하더라. 그 눈빛을 보니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싶었다. 그때부터 ‘왜 내 인생은 이렇게 더럽게 꼬였을까? 우리 가족은 왜 이렇게 됐을까?’ 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운명 탓인가 싶어 관상학 공부도 했다. 그러다가 ‘형제복지원만 안 들어갔어도’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02년 출소 뒤에 어떻게 지냈나?

“닥치는 대로 일했다. 짜장면, 한식 배달도 하고 전단도 뿌리고, 봉투 공장에서도 일하고, 막노동도 뛰었다. 초등학교도 졸업 못했으니 이력서 내라는 곳에 취업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2007년쯤 미군 숙소 공사 현장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쳐 추간판탈출증 진단을 받았다. 산업재해 신청을 하려 했는데 근로복지공단 자문의사 소견은 산재가 아니라고 했다. 다른 병원 찾아다니며 진단서 떼다 돈이 떨어져 신청을 접었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아 인터넷 신문고에 글을 올렸더니, 전화가 와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라고 하더라. 그래서 주민센터에 신청하러 갔다 이미 기초생활수급자였던 아버지와 작은누나를 찾게 되었다.”

-1987년 헤어진 뒤 처음 만나는 건가?

“그렇다. 아버지는 울산, 작은누나는 부산에 있었다. 어렸을 때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정상적으로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다. 찾아가보니 정신병원이더라. 아버지와 누나는 복지원 폐쇄 뒤 노숙자가 돼 부산 시내를 떠돌다가 1989년부터 정신병원에 있었다고 했다.”

-20년 만에 봤는데 한번에 알아봤나?

“30대 후반의 건장한 아버지는 없고, 삐쩍 마르고 이빨도 한개밖에 없는 할아버지가 있더라. 그 모습을 보니 원망이 한순간에 훅 가라앉아 버렸다. 아버지는 ‘내 아들은 여덟살인데’ 하면서 나를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찰이 복지원에 아버지를 보냈던 것처럼, 또 자신을 어디론가 데려가려는 국가기관에서 보낸 감시자라고 생각한다. 배우 신은경을 닮았다고 생각했던 작은누나도 뚱뚱한 아줌마가 됐다. 누나는 못 알아볼 정도라, 만나자마자 발등의 화상부터 확인했다. 어렸을 때 내가 먹고 싶다던 ‘쪽자’(달고나)를 만들다 국자를 떨어뜨려 생긴 화상이었다. 누나도 어른이 된 나를 못 알아본다. ‘내 동생 선이’라고 했다가 오빠, 삼촌, 아저씨라고 했다가…. 두 사람도 서로 못 알아본다. 아버지와 누나의 시간은 오래전에 멈춰 있었다.”

“닥치는 대로 다 죽여버릴까 생각하기도”

-가족을 찾은 뒤 변화가 있었나?

“형제복지원 사건이 해결돼야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커졌다. 그간 틈틈이 복지원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박인근 원장은 겨우 2년6개월형 마치고 나와 또 복지시설 운영하며 돈도 많이 벌었다. 나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돼 전전긍긍하며 사는데 저 인간은 잘살더라. 너무 화가 났다. 사이코패스가 이렇게 생기는구나. 닥치는 대로 다 죽여버릴까 생각할 때도 있었다.”

박인근 원장은 1989년 7월20일 출소 뒤 다음해 부산시 북구청에서 중증장애인 시설 신축사업비를 받았다. 형제복지원은 폐쇄됐지만 법인 명의는 남아 재육원, 욥의 마을, 형제복지지원재단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현재 법인 기본재산 221억원의 형제복지지원재단은 2년 전부터 박 원장의 셋째 아들이 운영하고 있다. 이 재단은 지난해 유명세를 탔다. 부산시가 재단을 감사한 뒤 횡령이나 유용으로 의심되는 43억여원에 대해 검찰에 수사의뢰했기 때문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재단의 입장을 듣기 위해 연락을 취했으나 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선택을 했나?

“‘억’ 소리라도 한번 질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뿐 방법을 몰랐다. 그러다 지난해 5월쯤 텔레비전에서 <콜래트럴>이란 영화를 봤다. 암살자 톰 크루즈가 인질로 잡은 택시기사에게 꿈이 뭐였는지를 물었다. ‘리무진 택시 회사를 차리는 것’이라고 하니 톰이 ‘당신은 꿈만 꿨기 때문에 인질이 된 거야. 꿈을 이루려면 빚을 내서라도 리무진 택시를 구입했어야 했다’고 말하더라. 그 말을 듣고 ‘고민만 해서는 안 되겠구나’ 싶어 다음날부터 국회 앞에서 노숙하며 1인시위를 했다.”

-국회 앞에서 1인시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주목받긴 어렵다.

“내가 쓴 손팻말을 읽어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다 여름쯤인가 어떤 사람이 와서 손팻말을 읽더라. 내 얘길 듣더니 ‘1인시위는 오래 못 간다’며 ‘무기가 필요하다. 기억나는 대로 글을 써봐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하고만 살아서 믿음이 안 갔다. 교수이며 어디 대표라고 하는데 그렇게 보이지도 않았고. 그 사람은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였다. 교수님 보내고 저녁에 곰곰이 생각했다. 1인시위 해도 아무도 안 봐주니 적대감만 생기는데 글이라도 써보자 싶어 그날로 짐을 싸 집으로 돌아갔다.”

한종선씨의 수기에 전규찬 교수와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의 글이 보태져 2012년 11월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이 나왔다. 한씨의 이야기가 알려지자 탈시설정책위원회와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등을 중심으로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기 시작했다. 올해 1월31일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대책위 준비모임을 꾸려 피해자 찾기, 국가기록원 등을 통한 자료조사, 학술토론회 등의 활동을 진행했다. 그 결실이 지난달 20여개 시민단체가 모여 출범한 대책위다.

-대책위 출범까지 왜 26년이 걸렸을까?

“아무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대법관이 국무총리 후보가 될 만큼 관련자들이 아직도 건재하니 쉬쉬 됐던 거다. 인권단체들은 지금 막 터지는 사건을 막느라 이를 살펴볼 시간이 없었다. 피해자들은 말했다간 또 잡혀갈까 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까 봐, 다른 시설에 지금도 갇혀 있어서 나설 수 없었다. 편견도 컸다. 부랑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데려간다고 하니까 좋게만 생각했다.”

내 인생은 왜 꼬였을까 
우리 가족은 왜 이렇게 됐을까 
운명 탓하다가 그는 생각했다 
‘형제복지원에만 안 들어갔어도…’

영화 <콜래트럴>에서 암살자인 
톰 크루즈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꿈을 이루려면 빚을 내서라도 
리무진 택시를 구입했어야 했어” 
다음날 당장 국회 앞으로 갔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최종적으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데 우리 같은 약자를 시설에 강제로 데려가 가뒀다. 정부가 허가해주고 예산도 줬으면 시설이 제대로 운영되는지 관리·감독해야 했는데 그것도 안 하고 방치했다. 복지사회를 구현한다면서 우리를 인간이 아니라 배부른 개돼지처럼 대했다. 우리는 그 안에 갇혔지만 배고픈 인간이고 싶었는데, 상명하복 명령체계에서 말 안 들으면 개돼지처럼 때리게 뒀다.”

제발 이제는 내 가족을 돌려다오

대책위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박인근이라는 개인에 의한 범죄가 아닌 반헌법적인 국가정책에 의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범죄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강경선 대책위 공동대표(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는 “형제복지원은 정부가 운영비를 지원한 국가 위탁 시설이었다. 수용자를 데려다 준 것도 경찰이나 지방자치단체 등 국가기관이었다. 부산시는 감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며 비리를 눈감아줬다. 검사의 수사를 막은 것도, 최종 판결을 내린 것도 국가다. 따라서 형제복지원은 국가 범죄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시각에서 대책위는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국가의 배상책임, 피해자 의료비 지원 등의 내용을 담은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조사 및 피해자 배상에 관한 법률’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피해자 찾기, 학술대회, 자체 진상조사 등의 활동도 벌이고 있다.

인터뷰 중에 한씨는 반가운 문자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고3 시절에 강제 입소되어 1년여를 복지원에서 생활하다 그 당시 유일하게 탈출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뜻깊은 일을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한씨는 피해자모임 대표로서 대책위 활동을 하며 피해자를 찾고 있다. 지금까지 40명의 피해자와 3명의 실종자 가족과 연락이 닿았다.

-만나본 피해자들은 어떻게 지내나?

“안정된 삶을 사는 사람은 2~3명 정도다. 연락이 오면 찾아가서 만난다. 대책위 활동 소개하고 같이 하자고 하는데 대부분 걱정부터 한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을 또 빼앗길까 봐 여전히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그럼 ‘지켜봐 달라.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하고 헤어진다. 그때 기억이 너무 생생하게 떠올라서 괴롭다면서 밤에 술 마시다가 전화하는 사람도 있다.”

-증언하고 활동하면서 전보다 나아졌나?

“과거를 다시 떠올리는 걸 견디는 것에 익숙한 것뿐이지 치유 안 된다. 이야기한다고 치유될 것 같으면 세상에 아픈 사람 없다. 내 상처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어야만 나을 수 있다.”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형제복지원 사건 뒤 10년 지나 양지마을 사건(1998년), 또 10여년 지나 ‘도가니’(2006년 광주 인화학교 사건)가 터졌다. 형제복지원 사건 터지고 26년이 흘렀지만 변한 게 없다. 똑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다시는 우리 같은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복지시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을 해결하는 게 잘못 끼워진 단추를 처음부터 똑바로 맞춰 나가는 길이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가족을 이제라도 돌려줬으면 좋겠다. 병원에서는 이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 어차피 나을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셋이 같이 남의 눈치 안 보고 살 수 있게끔 시골에 빈집이라도 임대해주고 생활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한겨레 : http://www.hani.co.kr/arti/SERIES/381/610460.html





Posted by 미메시스 미메시스TV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생존자


'한종선'님의 그림을 제가 다시 그려봤습니다~



책 <살아남은 아이>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1272156245&code=960201





87년 당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수사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 인터뷰


http://www.mbn.co.kr/pages/vod/programView.mbn?bcastSeqNo=1053379&p=2







Posted by 미메시스 미메시스TV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생존자


'한종선'님의 그림을 제가 다시 그려봤습니다~



책 <살아남은 아이>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1272156245&code=960201





87년 당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수사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 인터뷰


http://www.mbn.co.kr/pages/vod/programView.mbn?bcastSeqNo=1053379&p=2





'전승일_그림_시즌1' 카테고리의 다른 글

88년 전국 노동자대회  (0) 2014.02.10
형제복지원 "513명 사망"  (0) 2013.11.10
다시 그린 "형제복지원사건"  (0) 2013.08.25
날고 싶다~  (0) 2013.06.26
목장갑의 변신  (0) 2013.05.19
장 아메리 / 펠릭스 누스바움  (0) 2013.05.18
Posted by 미메시스 미메시스TV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인권오름 주간인권신문



26년, 형제복지원 - 형제복지원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 현재적 쟁점을 살펴보다


Posted by 미메시스 미메시스TV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12년 동안 513명 숨졌다"


(1987년 2월 2일 / 동아일보)






Posted by 미메시스 미메시스TV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말해도 맞고 늦게 씻어도 맞고…이런 곳, 언제까지?

[26년, 형제복지원] <10> 생존자들이 더 증언할 수 있도록 여건 갖춰야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열정 속에서도 우리는 형제복지원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2013년 한국 사회에 여전히 시설은 다양하게 존재하고 여러 권력과 폭력의 구조들이 그곳을 재생성하기도, 은폐하기도 한다.

여덟 살이던 1984년 10월 16일 형제복지원에 입소해 1987년 또 다른 시설로 옮겨진,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이 다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이제라도 시설은 어떻게 생겨났고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개인을 부수어 갔는지 물어야 하는 때이다. 살아남은 자와 다른 사회 구성원이 소리를 들으려 하고 여러 질문들을 곱씹을 때, 답이 아닌 '길'이 보일 것이라 믿는다. 그 소리가 우리 사회에, 우리의 가슴에 퍼지도록 인권오름과 탈(脫)시설 운동을 하는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이 함께 형제복지원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현재적 쟁점을 짚어보고자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

26년, 형제복지원
① 
전두환은 왜 531명 죽어 나간 그곳을 칭찬했나
② 500명 넘게 죽인 그곳…박정희·전두환은 책임 없나?
③ <도가니>보다 극악했던 그곳, 26년 지난 지금도…
④ 박정희와 전두환은 왜 '부랑인'을 겨냥했나
⑤ 앞에선 '전 재산 사회 출연', 뒤에선 '시설 재테크'
⑥ 그 '시설'은 어떻게 사체까지 300만 원에 팔았나?
⑦ '가난은 죄' 처벌 강화한 MB 정부…박근혜 정부도?
⑧ 매일 고문, 밤엔 동성 간 성폭력…거긴 지옥이었다
⑨ 531명 죽인 엽기 사건, 26년 지났다고 묻어야 하나


"그곳에 인권이나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결코 없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의 또 다른 피해자였던 박태길 소장이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 규명 및 해결 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에서 발표한 형제복지원에 대한 기억의 제목이다. 1984년 당시 14세이던 그는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잠을 자다가 새벽에 파란색 군용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갑자기 자신을 차에 태우더니 파출소를 거쳐 형제복지원에 수용했다고 했다. 어려서 신분증이 없는 것이 당연한데도, 없다고 그를 가뒀다. 형제복지원에 갇힌 많은 사람이 술주정을 했다는 이유로, 역에서 잠들었다는 여러 이유로 대부분 납치되듯이 수용되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폭행과 기합'을 받아야 했다.

때리는 이유는 갖다 붙이면 다 이유가 되었다. 밥 먹으면서 떠들었거나 세면을 빨리 끝내지 못했거나 빨리 대답을 하지 않았거나, 모든 것이 이유가 되었다. 중대장, 소대장, 서무 선도부 등의 군대식 호칭과 위계에서 폭력은 늘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성폭력도 존재했다. 비슷한 진술은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아이인 한종선 씨가 쓴 <살아남은 아이>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형제복지원의 경험은 "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의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의 기초가 되는" 것이라는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을 무색하게 한다. 현실에서는 '존엄성이 인정된 자와 존엄하지 않은 자'로 구분되고 분리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보여준다. 물론 형제복지원 인권 침해 사건은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 같은 극단적 사례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의 작성과 채택 배경은 사실 나치의 제노사이드 경험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선언을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나치의 학살 경험처럼, 1980년대 형제복지원에서 부랑아들을 짐승처럼 사육하고 죽였던 일이 반복되기 때문에 선언한 것이기도 하다.

▲ 형제복지원 수감 시절, <살아남은 아이>의 저자 한종선 씨 모습. ⓒ한종선


인간 존엄성을 박탈하는 폭력의 경험

이렇듯 모든 인간의 존엄성에서 '모든'이 삭제되는 순간, 존엄하지 않거나 존엄이 가볍게 여겨질 수 있다고 간주되는 자들의 권리는 제한되고, 인권은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부인된다. 존엄성을 가진 동일한 존재가 아닌 것으로 취급받으며 고문과 학대 등의 인권 침해가 잇따른다. 따라서 인간 존엄성을 인정하는 일은 이유를 묻지 않고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엄성을 그/녀의 가치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일이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철학적 쟁점을 검토한 메테 레베히(Mette Lebech)는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인간 특질만큼이나 다양하고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재가 어떠하기에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이거나, 신의 특성과 닮았거나, 이성적 존재이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거나 하는 특질)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가치는 개별 인간에게 속한 것이지 단순히 본성, 신념, 이성 또는 지위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 관계 속에서 한 경험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공동체이든 존중받고 사랑받은 경험은 그/녀에게 자존감을 느끼게 하고 나도 타인과 동등한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은 타인도 그러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 대우해야 함을 깨닫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경험으로 개별적 존재인 인간은 타인의 인간적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하며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사람들이 경험한 인간 존엄성 박탈의 경험은 심각하다. 형제복지원에서 그/녀들은 존엄하지 않은 인간으로 재탄생되었다. 형제복지원은 군대식 위계 구조를 복지원 운영의 주요한 방식으로 삼았고, 그 위계는 일상적인 폭력과 훈육의 근거가 되었다.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받은 같은 수용자들인 소대장·중대장들은 다른 수용자들에게 폭력과 모욕을 가했고, 일반 수용자들은 스스로 판단하는 자율적 주체가 아닌 명령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맞지 않으려면 복종해야 하기에 무조건 따랐다.

그 과정에서 일반 수용자뿐만 아니라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한 형제복지원의 소대장·중대장들의 존엄성도 상실된다. '어떤' 시점에서 '누군가'는 타인에 의해 모욕을 당하고 판단을 할 수 없는 타율적 존재로서 '존엄성을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개개인에 대한 존엄과 자율성의 부여는 외부자를 존엄한 존재로 만들지만, 타인을(에게) 존중하지(받지) 않은 경험은 존엄을 모든 인간의 가치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평등하고 존엄한 인간 관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경험이다. 부랑자이든 가출한 청소년이든 기계나 짐승처럼 다뤄졌던 그/녀들은 더 힘 있는 자에게 무조건 복종하거나 그에게 잘 보이는 것으로 잔인한 먹이사슬에서 생존하기에 급급한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한다.

관료주의와 시설

원주에 있는 사회 복지 시설에서 시설 장애인을 폭행하고 기초수급비 착복을 했다거나 제천에 있는 영육아원에서 아동들을 학대했다는 등의 소식을 우리는 아직도 접한다. 이러한 시설에서는 인권 침해가, 민주화되고 문명화되었다는 2013년에도 현존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시설이 존재하는 한 인권 침해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무엇이 시설을 만들도록 부추기는지 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부추김의 밑바닥에서 관료주의를 보게 된다.

관료주의는 문제의 효율적 해결을 위해 시설을 선호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지적했듯이 나치의 홀로코스트도 "현대성의 정수, 다시 말해 합리화와 객관성으로 포장된 도덕적 무관심, 관료주의와 합작되면서 가능했던 사태"였다. 당시에 유대인 학살은 일상적인 관료주의 절차 중에 하나였기에 이들은 합리적 수단과 방법을 고안하고 수지를 맞추기도 하고 규칙도 정했다.

형제복지원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장애인 시설이든, 보육 시설이든 간에 시설의 탄생은 관료주의적 합리성을 주요 요건으로 한다. 시설이 국가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는 언제든 '합리적'인 시설 내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 아니 시설 자체가 폭력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기준으로 특정 집단이나 특정 성질을 분리해내서 소환하고 모으는 것 자체가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그/녀는 술을 자주 많이 먹기 때문에, 그/녀는 가족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노숙인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집단화하고 특정 정체화하는 분리와 구분은 격리와 배제와 그리 멀지 않다. 과거 소록도에 한센병을 앓는 사람들을 강제 수용하여 사회로부터 격리한 국가의 합리적 폭력이 가능했던 것처럼 말이다. 특정 집단을 시설에 모아서 관리한다면 국가는 더 이상 정책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으며, 장애인이든 부랑인이든 탈가정 청소년이든 술에 취한 사람이든 간에 그/녀들과 일일이 만나 항의나 요청을 받지 않아도 된다. 시설에 있으면 인력과 재정을 추가로 쓰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이유로 관료주의적 합리성은 시설을 포기하지 못한다. 형제복지원에서 원생의 시신을 병원에 팔아서 돈을 벌었던 것이 가능했던 것은 원장의 탐욕만이 아니라 부랑아로 대표되는 빈민들을 한곳에 가두어 관리할 수 있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국가 관료주의의 시설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탈시설 정책은 국가의 관료주의적 폭력성을 제거하는 일이기도 하다.

▲ 1980년대, 끔찍한 인권 유린이 있었던 형제복지원 '수용 시설'의 모습. ⓒ연합뉴스


함께 존엄성을 회복하기

1987년 형제복지원의 인권 침해가 세상에 알려지고 복지원에 있던 사람들이 복지원을 탈출하였지만 그/녀들은 다시 또 다른 시설에 들어가거나 사회에 완전히 들어오지 못했다. 복지원에 있었다는 경험만으로 사회는 '복지원에 있었던 사람이니 위험하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낙인을 찍었기에 그/녀들은 피해의 경험조차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폭력을 당한 경험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결여되었고 또한 그것을 방어할 수단이 부족했다는 사실로 인지돼 개개인의 마음과 몸을 다치게 한다. 나아가 인간임을, 존엄성을 무시당한 경험은 자기 존중감에도 심각한 손상을 입힌다. 그러나 그/녀들은 말할 수 없었다. 증언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종선 씨가 만난 많은 형제복지원의 피해자들은 그 '경험'이 내 삶의 고통으로 오롯이 남아 있음을 숨기려고 노력하지만 숨길 수 없음을 한탄했다.

<품위 있는 사회>의 저자 아비샤이 마가릿의 말처럼, 자기 존중은 존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태도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태도에 의존한다. 따라서 형제복지원의 생존자들이 자기 존중과 존엄성을 회복하려면 존중받고 있다는 '사회적 확인'이 필요하다. 그를 위해서는 우리들이 더 많이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생존자들이 더 많이 말할 수 있도록 여건(소통의 공간, 말하기의 장소)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생존자 한종선 씨가 <살아남은 아이>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고, 최근 실험극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바다를 떠돌았다>에 출연한 일은 한종선 씨를 비롯한 생존자들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방조하고 외면하며 잃어버렸던 우리의 존엄성을 '함께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 한종선 씨만이 아니라 더 많은 생존자들이 증언하고 기록하고 말할 수 있게 사회 구성원인 우리가 더 많이 들을 수 있도록 기획할 때이다.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30731161204&Section=03







Posted by 미메시스 미메시스TV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531명 죽인 엽기 사건, 26년 지났다고 묻어야 하나

[26년, 형제복지원] <9> 형제복지원 특별법 제정해야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열정 속에서도 우리는 형제복지원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2013년 한국 사회에 여전히 시설은 다양하게 존재하고 여러 권력과 폭력의 구조들이 그곳을 재생성하기도, 은폐하기도 한다.

여덟 살이던 1984년 10월 16일 형제복지원에 입소해 1987년 또 다른 시설로 옮겨진,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이 다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이제라도 시설은 어떻게 생겨났고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개인을 부수어 갔는지 물어야 하는 때이다. 살아남은 자와 다른 사회 구성원이 소리를 들으려 하고 여러 질문들을 곱씹을 때, 답이 아닌 '길'이 보일 것이라 믿는다. 그 소리가 우리 사회에, 우리의 가슴에 퍼지도록 인권오름과 탈(脫)시설 운동을 하는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이 함께 형제복지원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현재적 쟁점을 짚어보고자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

26년, 형제복지원
① 
전두환은 왜 531명 죽어 나간 그곳을 칭찬했나
② 500명 넘게 죽인 그곳…박정희·전두환은 책임 없나?
③ <도가니>보다 극악했던 그곳, 26년 지난 지금도…
④ 박정희와 전두환은 왜 '부랑인'을 겨냥했나
⑤ 앞에선 '전 재산 사회 출연', 뒤에선 '시설 재테크'
⑥ 그 '시설'은 어떻게 사체까지 300만 원에 팔았나?
⑦ '가난은 죄' 처벌 강화한 MB 정부…박근혜 정부도?
⑧ 매일 고문, 밤엔 동성 간 성폭력…거긴 지옥이었다


1987년 형제복지원이 세상에 알려진 지 26년이 지났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왜 이 사건이 다시 거론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아마 당시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여기에 박인근이라는 개인의 인적 배경이 더해져 이를 빠른 시간 내에 최소한으로 무마하려 했던 국가의 의도가 크게 작용했을 듯하다. 또 다른 한편 피해자들이 자신의 의사를 강하게 주장하기 어려운 주변인이라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조직화·집단화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 이들은 개인적으로도 어디에 어떻게 자신들의 피해 사실을 항변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 지내왔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26년 만에 갑자기 한 사람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자칫하면 아무도 듣지 못할 수도 있었던 이 절규에, 다행히도 조그마한 사회적 반향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의 얘기가 조금씩 모이고, 이에 따라 사건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문제의 원인과 배경에 대한 진단이 이뤄지고, 누구에게 이 엄청난 인권 침해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인가 하는 논의도 제시되었다. 이제 더 구체적으로, 법적으로 이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면 어떤 방법을 택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가다듬어야 할 때다. 여기에는 물론 특별법 제정을 통한 해결 방식도 포함된다.

다른 과거 청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사건의 진실을 낱낱이 밝히는 것이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3500명 이상이 대부분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수용되어 있었고, 강제 노역은 물론 일상적인 폭행과 가혹 행위가 자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531명이 사망했다는 대강의 얼개에 비추어 볼 때, 이 사건의 인권 침해 수준은 결코 가볍지 않다. 당시 원장이던 박인근이 국고 횡령과 외화 밀반출 등의 혐의로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고 하나, 이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일 뿐 사안의 전체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이제라도 실종자를 포함하여 사망자의 정확한 수와 원인, 강제 수용 과정과 불법 감금 여부, 폭행과 강제 노동을 포함해 일상에서 이뤄진 인권 침해, 국가 예산은 물론 수용자의 임금에 대한 횡령 여부 등 모든 사안을 철저히 조사하여 진상을 밝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재승 교수가 제안한 '진실에 대한 권리'가 그 법적 근거로 제시될 수 있다. 유엔인권위원회의 '불처벌 투쟁 원칙'을 비롯해서 몇몇 국제 조약들은 대규모의 인권 침해가 자행된 사건에 대해 피해자의 알 권리를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미주의 인권 법원은 이러한 권리를 판결을 통해 법적으로 인정한 바도 있다.

나아가 국내법의 시각에서도 헌법상의 재판 청구권이나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일반적인 기본권으로부터 이러한 '진실에 대한 권리'를 도출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안의 진실을 충분히 조사하여 이를 알려줄 것을 요구하는 피해자들의 권리는 단순히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을 넘어 법적인 권리의 하나로 파악될 수 있고, 반대로 국가는 이를 보호하고 실현할 법적인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다.

▲ 1987년 2월 3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형제복지원 사진. ⓒ동아일보 지면 캡처


진상 조사와 가해자 처벌

현실적으로 이러한 진상 조사는 어떻게 가능할까. 가장 좋은 것은 아마도 지금 부활이 논의되고 있다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일 것이다. 객관적인 진실 규명과 이를 통한 과거 청산의 의지가 가장 높은 국가 기관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다면 가능한 다른 방안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조사를 요청하거나 국회에 국정조사를 청원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공신력 있는 국가 기관으로 하여금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에서 사건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송을 포함하여 이후에 이루어질 법적 구제에서 중요한 하나의 판단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진상 조사는 가급적 빨리 언제라도 이루어지면 좋을 것이지만, 부득이하게 특별법 제정 시까지 미루어진다면 이것이 법률안의 첫 번째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검토되어야 하는 것은 가해자 처벌이다. 과거 청산 사건에서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불필요한 정치적 논쟁과 이로 인한 사회 혼란을 방지하고 가능한 합의에 기초한 문제 해결을 통해서 앞날을 위한 가치를 보전해 가자는 주장도 있지만, 우리는 가능하다면 형사 판결을 통한 국가와 사회의 가치 표명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의와 도덕의 기준에 대한 분명한 판단이 오히려 불필요한 이념적·정치적 논쟁을 막아 줄 수 있고, 장래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명시적인 가치와 행동의 기준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 사건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시효이다. 이 사건 범죄 행위 중 가장 무거운 살인죄에 대해서도 이미 공소 시효는 한참 전에 만료되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특별법을 통해 공소 시효를 연장하는 규정을 둘 수 있는가 하는 점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기간이 지난 공소 시효를 연장하는 것(이를 '진정소급효'라 한다)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학설의 일반적인 입장이고 또 판례의 태도이다. 물론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의 공소 시효 연장 규정에 대해 이를 합헌이라고 본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다. 하지만 이 결정에서도 위헌 의견이 5명으로 다수였으며, 소수 의견도 진정소급효 자체가 합헌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를 상쇄할 수 있는 절대적인 공익적 필요가 있는 경우 소급효가 허용될 수 있다고 보았음을 주의해야 한다.

더욱이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입장에 대해서는 '공익'을 이유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소급효를 허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 심각한 반론이 있다. 형사법에서 소급효 금지를 통해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국가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자는 것이 본래 취지이며, 이것은 공익과 같은 국가 권력의 행사 근거를 이미 염두에 둔 것이므로 이를 이유로 다시 소급 효법을 제정할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이 사건 범죄를 '국가 범죄'로 보고 이에 대해서는 아예 공소 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사건 범죄 행위를 국가 범죄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있다. 이 사건이 포괄적으로 국가 범죄의 성격을 띠고 있고 박인근이 국가 예산을 지원받기도 하였으며 원생들의 수용 과정에 국가가 직접 간여한 정황도 있기는 하지만, 살인이나 폭행, 강요, 감금 등과 같은 주된 범죄 행위의 직접적 행위자는 불가피하게 개인인 박인근과 그 추종자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근대 형법의 기초 원리, 즉 행위자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는 '자기 책임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형사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따라서 특별법에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공소 시효의 연장 또는 정지 규정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렇다면 피해자에 대한 배상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소송을 통한 방법과 특별법을 통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소송을 통한 피해자 배상

소송을 통한 피해자 배상은 민법의 불법 행위에 근거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즉,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 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불법 행위의 규정에 따라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때 그 가해자의 고의 또는 과실, 가해 행위와 손해 발생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해서 피해자가 입증하여야 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민사 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에는 저들이 자신에게 가한 손해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형제복지원 사건의 경우 2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점에서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 시효가 문제 된다. 민법은 불법 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피해자나 그 법정 대리인이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내, 불법 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 내에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3년의 소멸 시효 기산점은 피해자나 그 법정 대리인이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때이고, 안다는 것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인식을 하였다는 뜻이다. 사람이 상해를 입거나 사망한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날 손해 발생을 안 것으로 되며, 후유증 등의 예견할 수 없었던 손해가 나중에 발생되는 경우와 같이 확대되어 나타나는 손해는 그러한 사유가 판명되어 새롭게 발생된 손해를 안 날로부터 별도로 시효가 진행된다. 또한 손해를 안다는 것에는 가해 행위와 손해 발생 사이의 인과 관계의 인식도 포함하게 되므로 사망자의 사인이 판명되지 않았다면 손해를 알았다고 할 수가 없게 된다.

가해자를 안다는 것은 손해배상 청구의 상대방이 되는 자를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불법 행위자가 사망한 경우 그 상속인이 포함된다. 또한 손해 발생을 알아도 가해 행위가 불법임을 알지 못하면 시효는 진행되지 않는다. 따라서 3년의 소멸 시효에서 시효 진행이 시작되는 것은 가해 행위가 불법 행위로서 이를 원인으로 하여 손해배상을 소구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 아는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손해 및 가해자를 인지하게 된 시기는 주장하는 사람이 입증해야 한다. 10년의 소멸 시효 기산점은 불법 행위를 한 날인데, 이것은 현실적인 손해가 발생한 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것은 피해자가 손해의 결과 발생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는가 여부와는 상관없이 가해 행위로 인한 손해가 현실적인 것으로 되었다고 볼 수 있는 때로부터 진행하게 된다.

이와 같이 개별적인 민사 배상 소송의 경우에는 현실적으로 소멸 시효라는 부분에서 많은 걸림돌이 예상된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비정상적인 시대와 정권이 만들어낸 엽기적인 인권 침해 사건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 회복과 배상을 위한 특별법이 더 절실해 보인다. 26년이 흐른 지금 피해자들은 사망했거나 정신적·신체적 장애들로 인해 제각각 흩어져 있어 그들의 현재 상황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증거 자료들을 수집해서 개별적인 소송을 제기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시간과 노력들, 그리고 현실적으로 돌파해야할 소멸 시효의 법리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별법 제정을 통해 형제복지원이라는 시설 내에서 이루어진 광범위한 불법 행위의 진상들을 공신력 있는 위원회를 통해 규명하여야만 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 회복과 배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정학·김재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교수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30724165617&Section=03







Posted by 미메시스 미메시스TV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매일 고문, 밤엔 동성 간 성폭력…거긴 지옥이었다

[26년, 형제복지원] <8>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이 말합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열정 속에서도 우리는 형제복지원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2013년 한국 사회에 여전히 시설은 다양하게 존재하고 여러 권력과 폭력의 구조들이 그곳을 재생성하기도, 은폐하기도 한다.

여덟 살이던 1984년 10월 16일 형제복지원에 입소해 1987년 또 다른 시설로 옮겨진,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이 다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이제라도 시설은 어떻게 생겨났고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개인을 부수어 갔는지 물어야 하는 때이다. 살아남은 자와 다른 사회 구성원이 소리를 들으려 하고 여러 질문들을 곱씹을 때, 답이 아닌 '길'이 보일 것이라 믿는다. 그 소리가 우리 사회에, 우리의 가슴에 퍼지도록 인권오름과 탈(脫)시설 운동을 하는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이 함께 형제복지원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현재적 쟁점을 짚어보고자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

26년, 형제복지원
① 
전두환은 왜 531명 죽어 나간 그곳을 칭찬했나
② 500명 넘게 죽인 그곳…박정희·전두환은 책임 없나?
③ <도가니>보다 극악했던 그곳, 26년 지난 지금도…
④ 박정희와 전두환은 왜 '부랑인'을 겨냥했나
⑤ 앞에선 '전 재산 사회 출연', 뒤에선 '시설 재테크'
⑥ 그 '시설'은 어떻게 사체까지 300만 원에 팔았나?
⑦ '가난은 죄' 처벌 강화한 MB 정부…박근혜 정부도?


시설에서 살아왔던 나는…

1984년 나와 누나는 형제복지원이라는 부랑인 시설에 수용되었습니다. 우린 아버지라는 보호자가 있었고 국민학교도 다니고 있는, 가정이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왜 시설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9세의 내 나이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구타와 기합, 고문,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밤에는 동성 간의 성폭력에 휘둘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의식주 모든 것이 상식 이하의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먼 곳에서 형제복지원을 보면, 그러니까 거대한 건물과 자로 잰 듯 반듯한 시설의 모습만 보면 훌륭한 시설이겠거니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 그 안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매일 반복되는 지옥이었습니다. 난 그곳에서 누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저 누나와 함께 있고 싶었는데…. 그리고 밥도 많이 먹고 싶었고, 잠도 편히 오래 자고 싶었는데…. 내가 원하는 그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때리지만 말았으면, 그저 기합 좀 줄여줬으면 하는 게 내가 형제복지원에 바랐던 소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맞는지도, 왜 기합 받는지도 모르면서 그런 것들을 줄여달라고 속으로 애원하는 정도가 소원일 정도로 형제복지원 시설이라는 곳은 그러했습니다.

▲ 한종선 씨의 책 <살아남은 아이>에 나온 한종선 씨의 과거 사진. ⓒ한종선


또 다른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만나며

살아오면서 '왜? 나는 뭐지? 내가 왜? 무엇 때문에?'라는 의문점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 끝엔 형제복지원이 있었습니다. 나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세상에 알리면서 형제복지원 피해자 형님, 누님 그리고 동갑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잊히더냐고…요.

그들은 "다 잊었다고 생각했었다"라고 말하며, 그러나 문득 자신도 모르게 인터넷 검색창에 형제복지원이라는 단어를 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고 수많은 유사 사건들을 접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잊을 수만 있다면 영원히 잊고 싶다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두렵다고 했습니다.

기껏 벗어났다고 여겼지만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힘들어했습니다. 어렵게 이룬 가정이 또다시 깨져버릴까 전전긍긍하며 전면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들이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면서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하겠다며 도리어 나를 위로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중 한 가지인 증언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 저와 연락이 되는 피해자분들은 그나마 자기 의지로 본인의 과거를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습니다만…, 수많은 다른 분들은 형제원에서 겪은 후유증 등 장애로 인해 또 다른 시설에서 생활 하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난 그들과 만날 때, 될 수 있으면 형제복지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같은 상처와 같은 아픔을 겪어온 사람들이기에, 그들에게 내가 다시 확인차 묻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예의가 아니기에 형제복지원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는 이제 대책위가 출범하면 그들이 밝혀낼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누구나 다 인정하는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피해 당사자들이 모르는 사람이고 믿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그들에게 신뢰가 쌓일 수 있는 그 무엇인가 '액션'이라도 보여주셔야 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했듯 피해자들이 왜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지 생각한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그리고 왜 지금 내가 혼자 이렇게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리고 있는지를 빨리 파악해주시고 많은 전문가들께서 답을 모아야 할 때라고 봅니다. 때가 되면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낼 거라 저는 확신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현재 피해자들의 고통을 글로 옮기다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나뿐만이 아닌 모든 피해자가 겪고 있는 고통은 솔직히 말로 표현하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내게 그저 "난 괜찮아"라며 무덤덤하게 말을 하지만, 표현이 불가능하기에 '난 괜찮아'라는 아주 짧은 한마디로 함축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내가 형제복지원에서 겪은 일들을 여러분들께 말할 때 웬만하면 항상 웃으면서 말하는 이유처럼 그들은 그렇게 '난 괜찮아'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난 괜찮아"라는 단어를 곧이곧대로 듣고 '괜찮은가보다' 여기고 방치해선 안 된다는 게 내 개인적 바람입니다.

사회가 노력해야 할 것들을 글로 옮기다

사회 복지 시설의 문제가 어제오늘 있었던 일들이 아니라는 점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도, 미래에도 형제복지원 사건처럼 사회 복지 시설의 문제는 꾸준히 일어날 것입니다. 그럼 왜 일어날 수밖에 없는지 기본적으로 따지고 묻고 답하고 하는 기초적인 토론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회 구조라는 것이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돌아감에도 무엇을 논의할 때 특별 계층끼리 하기보다 법을 만드는 사람, 학자, 교수, 복지계 사람들, 그리고 인권 운동가들로만 진행되었다면!

앞으로 두 자리 정도만 더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 두 자리란, 토론 주제의 내용 속에 포함된 피해자의 자리. 그리고 일반 시민들의 자리를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 하더라도 국민이 모르고 피해자가 느끼지 못한다면. 훌륭하신 분들이 수많은 토론과 시간을 투자해서 만든 것이 빛이 바래지 않을까요? 저는 그 어떤 어려운 일들이 있다 하더라도 해결 못 할 일들은 없다고 봅니다. 해결 못 할 일들이 있다면, 아마도 그건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 그렇게 되겠지요.

▲ 한종선 씨는 자신이 생활했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해냈다. ⓒ한종선


희망 사항을 글로 옮기다

희망이 있기에 행동할 수 있었고, 희망이 있기에 여러분들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희망을 끄지 말아 주세요. 변방연극제에서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 바다를 건넜다>라는 연극을 하면서 저는 아무런 대본 없이 그냥 무대 위에 서서 저의 이야기를 했었지요. 저는 정신병원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종이로 접은 거북이와,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내가 병원 면회장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들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관객들께 자랑하고자 생각했던 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대에 오르는 순간 가족사진에 비친 아버지와 누나모습을 보곤 생각해두었던 말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곤 다른 단어들이 떠올랐습니다.

"한 손엔 종이로 접은 거북이가, 한 손엔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제가 같이 있는 가족사진이 있습니다. 저의 어릴 적 가족사진엔 아버지와 어머니, 큰누나, 작은누나 그리고 제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머니와 큰누나가 없습니다. 이 가족사진엔 이제 셋만 남았습니다. 그나마 저는 이렇게 액자에 가족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가슴엔 그저 텅 빈 액자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 그들의 가슴속에 빈 액자로 남아 있는 그 자리에 가족을 만들어 주셔야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하면서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습니다. 울어서는 안 되는데…, 자랑하고 싶었는데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만…, 여러분들은 해줄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별 볼 일 없는 저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이겨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종선 <살아남은 아이> 저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30716183051&Section=03







Posted by 미메시스 미메시스TV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부산에도 '도가니'? 이 지옥은 왜 무사한가!

[프레시안 books] 한종선·전규찬·박래군의 <살아남은 아이>

기사입력 2013-02-01 오후 7:00:14



1987년, 나는 서울 은평구에 사는 초등학생이었다.대학가나 시내 중심가로부터 외떨어진 곳에 살았기 때문에 당시 매일매일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는 데모의 행렬도 한 번인가밖에 보지 못했고, 부모님은 TV 뉴스에 데모대가 등장하면 "대학 가면 공부나 열심히 해라, 저런 데 끼지 말고"라고 타일렀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1987년이 어떤 해인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민주화 항쟁, 박종철 치사 사건, 남영동 고문실, 이런 단어를 알게 된 건 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다음이었다. 나는 분명 그 시대를 살았지만 그 시대를 알지 못했다. 내가 살았던 시대는 언제나 한참 전의 과거로서 추체험되는, 누군가가 제공하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이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아이>(한종선·전규찬·박래군 지음, 문주 펴냄)를 읽었다. 1987년의 민주화항쟁과 같은 시기에 존재했으나 지금은 거의 기억하는 이 없이, 공적인 기록에서도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한 채 잊힌 '괴물의 시간'을 알게 됐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과거사는 얼마나 많은가. 또 그 사건들이 일부러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끔, 우리 귀에 들리지 않게끔, 조직적이며 공적인 차원에서 제거된 사건이라면, 그 사건들은 우리 앞에 어떻게 스스로를 노출시키고 알릴 수 있는 건가.

1984년, 한종선은 큰누나, 작은누나, 아버지와 함께 부산에서 살았다. "어머니 모습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우리 삼남매를 키우기 위해 구두를 닦으셨다." 가난한 노동자인 아버지는 술 취하면 종선을 때렸다. 어느 날 큰누나는 친척집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아버지는 종선과 작은누나를 데리고 나가 새 신발과 옷을 사주고 이소룡이 나오는 영화를 보여준 다음 근처 파출소로 향했다.

아버지는 우리보고 여기 좀 있으라고 했다. 조금만 있으면 아버지가 찾으러 올게, 하고 파출소를 나가셨다.

▲ <살아남은 아이>(한종선·전규찬·박래군 지음, 문주 펴냄). ⓒ문주
btn

조금 뒤 파출소 앞에 낯선 차가 섰고, 거기서 우르르 내린 아저씨들은 한종선과 누나를 차에 태우고 어딘가로 향했다. 1984년 10월 16일, 두 아이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사회복지시설"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다. 복지원의 신상기록카드에는 '의뢰처'가 '동광파(출소)'로, '연락인'은 아버지가 아니라 '통장'으로 적혀 있었다. 남매는 복지원 내 23소대와 24소대에 각각 입소했다. 한종선은 1984년 10월부터 1987년 1월까지 그곳에서 지옥의 나날을 보냈다.

새벽 4시 반 기상하여 저녁 8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원생들의 하루는 군대식 훈련과 강제 노역, 끊임없는 폭력으로 채워졌다. 기합의 이름은 참 다양하기도 했다. 이불말이(모다구리), 히로시마, 나룻배, 전깃줄, 한강철교, 고춧가루귀뚜라미…기합은 너무 일상적이었기 때문에, 맞을 때마다 머리가 깨지거나 장이 파열되거나 팔 다리가 부러지지 않도록 최대한 자세를 바로잡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복지원 안에서 소문은 아주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런데 대부분의 소문은 사실이었다.
"몇 소대 누구는 어제 귀가되었대!"
"몇 소대 누구는 그저께 빳다를 잘못 맞아 다리를 못 쓰는 병신이 되었대!"
"누가 죽었대."
이런 소문들은 금세 복지원 전 소대에 퍼져 나갔다. 우리는 귀가한 사람이 진짜 안 보이면 "이야, 진짜 좋겠다!"라며 부러워했다. 빳다를 잘못 맞은 사람이 정말 한쪽 다리를 못 쓰고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일요일 교회 가는 날 산 주변을 훑어 보면 새로운 무덤이 어김없이 생겨나 있었다. 우리는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죽어 묻혔다는 것을 말이다.

식사는 매번 "꽁보리밥에 생선 썩은 전어젓과 소금 뿌린 배추김치"로만 구성되었는데, 이나마도 5분 내로 다 먹지 못하면 기합을 받았다. 아이들은 너무 배가 고파 화단에서지네를 잡아먹거나 솔방울을 씹어 먹었다. 병에 걸리거나 다치더라도 당연히 정식 치료는 받을 수 없었다. 철제 앵글에 찔려 뺨이 반쯤 뚫렸을 때에도, 동상 때문에 발가락 10개 모두 절단되더라도, 옆구리가 터져 곪아 썩어 들어가는데도 항상 똑같은 알약 2개를 주거나 '빨간약'만 바르고 말았다.

우리는 (째진 부위를) 찬물로 깨끗이 씻고 운동장에 있는 아주 얇고 고운 흙을 상처 부위에 뿌렸다. 그러면 그 흙이 딱지를 만들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치료 방법이었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도 팔다리가 멀쩡할 수 있었다.

옆 소대로 끌려간 작은누나는 동생을 만나게 해달라고 계속 부탁하다가 결국 "옷을 다 벗기고 손을 묶은 후 나무 막대기에 비닐을 씌어 여자 자궁을 사정없이 찌르고 빼는" 체벌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 말을 전해주었다. "니 누나, 정신병이 심해져서 정신이상자들이 있는 신관으로 갔다." 한종선은 누나가 너무 보고 싶어 위험을 무릅쓰고 금지구역인 정신병동을 훔쳐보았다. 그곳에는 누나를 포함해서 여자들이 손발이 묶인 채 누워있고 남자들이 그녀들을 강간하고 있는 게 훤히 비쳐보였다. 얼마 뒤, 남매를 버렸던 아버지마저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다.

형제복지원에서의 참혹한 나날에 대한 한종선의 글자 기록은 72쪽으로 끝이다. 이건수기의 절반에 불과하다. 형제복지원의 실상이 드러나고 건물이 폐쇄된 다음 또 다른 소년의 집으로 이송된 한종선에게 비로소 '자유로운' 세상이 펼쳐졌을까? 그렇지 않다. 10살을 조금 넘긴 소년이 폭력의 구조만을 몸에 체득한 채, 세상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홀로 내팽겨쳐진다면 뭘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여전히 사기와 갈취를 당했고 결국 범죄에 손을 댔으며 감옥을 들락거렸다. 그가 마음을 잡았던 건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작은누나와 아버지를 찾아낸 다음부터다. 두 사람은 모두 1989년부터 정신병원에 입원해있었다.

한종선은 30년 가까이 자신과 가족들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형제복지원을 향해 뭐라도 하기로 마음먹었다. 2012년 무더운 여름, 국회의사당 앞에서 무작정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복지원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그는 타인의 시선을 견뎠다.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이자 문화연구자 전규찬과 마주쳤다.

전규찬 교수는 그에게 지난 삶을 글로 써볼 것을 권유했다. 이렇게 긴 글을 처음 써본다는, 무식한 내가 감히 이런 글을 써도 되냐며 주춤거렸던 한종선의 덤덤한 단문은 그가 아직도 시원하게 발산해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분노와 탄원을 더 강력하게 웅변한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개나 소나 다 글을 쓰는구먼."
그렇다. 한때 나는 개였고 소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 나 역시 아니 우리 가족 역시 당신들과 같은 가정이 있었던 일반 사람이었다.
사람에서 짐승처럼 되긴 쉽다. 그렇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말로는 쉽지만 사실은 너무나 힘이 든다. 죽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지금 힘들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해할 수 있는가?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10분의 1도 채 담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하며, 글의 말미에 덧붙인다.

"부탁합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이름조차 밝히지 못하는 수많은 복지원 피해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

한종선의 글 말미에는 형제복지원 시절을 묘사한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사인펜으로 대충 낙서한 것처럼 보이는 그림이지만, 디테일은 정교하고 대사들은 살벌하다. "오줌싸개 마귀를 쫓아내고 있는 원장 마누라"라는 화살표, 어린 원생의 성기 주변을 꽉 누르며 "따라해, 주여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원장 마누라', "으-아 주여 믿습니다"라며 울부짖는 원생의 초상 같은 것. 어쩌면 글을 읽을 때보다, 서툴지만 누군가의 기억을 정교하게 복원하는 그 그림이 더 몸서리쳐지는 고통이었다.

<살아남은 아이>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있다. 한종선의 증언록(전규찬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소설(小說)', 즉 작은 이야기), 인간의 '예외 상태'에 대한 전규찬 교수의 해설, 그리고 인권활동가 박래군이 사회복지시설을 둘러싼 '침묵의 카르텔'을 분석하는 글.

이런 구성은 <나, 피에르 리비에르>(미셸 푸코 지음, 심세광 옮김, 앨피 펴냄), 즉 어머니와 누이와 어린 남동생을 죽인 '살인마 괴물' 피에르 리비에르의 수기와 그 기록에 대한 미셸 푸코 및 동료 연구자들의 해설을 붙인 구성에서 아이디어를 얻지 않았을까 싶은데, <나, 피에르 리비에르>보다 <살아남은 아이>의 해설 쪽이 훨씬 더 명쾌하다는 걸 부인할 순 없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아이>의 해설은 <나, 피에르 리비에르> 같은 '해석'이나 '담론'이라기보다는 독자라는 거대한 배심원들을 향한 기나긴 고발장이자 한국 현대사의 부끄러운 일부를 향해 쏘아붙이는 기나긴 선동문이기 때문이다.

한종선의 수기만큼이나 전규찬과 박래군의 글도 중요하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주리고 목마른 이들과 함께함은 주께서 내게 명령한 사명"이라던 형제복지원의 박인근 원장의 행보에서 분통을 터뜨리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복지원 자체의 자료로만 513명(아마 더 많은 수치가 기재되어야 할 것이다)이 그곳에서 죽어나갔는데, 박인근 원장이 1989년 받은 형량은 벌금형 없이 2년 6개월의 징역이었다. 그는 출소 이후에도 계속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지원재단'으로 승승장구하는 '복지재벌'로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의 3남이 현재 이 법인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아마 이 부분에 이르러, 영화 및 소설 <도가니>가 광주 인화원에 끼친 영향을 떠올리면서 "왜 여긴 무사한가"라는 공분을 느끼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럴 때 박래군의 글은, 사회복지시설이 한국 사회 내에서 어떤 식의 관계망을 통해 선한 탈을 쓴 괴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는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박래군은 형제복지원뿐 아니라 광주 인화원, 에바다복지회, 청암재단, 성람재단, 성실정양원 등의 사회복지시설 내에서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인권침해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이런 부조리한 시스템이 가능한 이유를 분석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약자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 이유는 이상한 사유화의 방식이다. '사재'를 털어 사회복지시설을 설립한 이는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아서 운영함에도 불구하고 설립 당시부터 내 재산이라는 인식은 사회복지시설의 공공적 성격을 현저하게 약하게 만든다." 이것이 사회복지시설의 족벌 체제 경영으로 이어진다. 세 번째 이유는 시설장과 '원만하게' 유착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다.

형제복지원의 박인근 원장으로 대표되는 '악의 축' 한 명에게 처벌을 가하는 것만으로는 이 만연한 '침묵의 카르텔'이 끊어질 수 없다. (이 말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박 원장도 어찌 보면 불합리한 한국 사회의 한 조각일 뿐이다'라는 식의 핑계로 들리지 않길 바란다) 한국에서(분명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곳도 많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사회복지시설이라는 탐욕과 몰이해의 건축물은 아주 오랫동안 면죄부를 부여받은 부동산이기 때문이다. 이 건축물의 '도면'은 전규찬의 글에서도 자세하게 드러난다.

전규찬은 좀 더 뒤로 물러서 아예 한국현대사를 훑으면서 부랑아와 복지시설이 어떻게 구성되어왔는지 재구성한다. 1920년대에 처음 등장한 '부랑아'라는 단어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를 일컬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하지 않고 놀면서 도시를 떠도는 주거부정, 신원미상의 프롤레타리아트'로 바뀌었다. "가혹한 식민지 수탈과 각종 재해로 대량의 이촌 농민들이 발생하고, 이들이 도시로 유입되면서 현대적 의미의 '도시 부랑자'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일제 시대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사회복지사업이 시작되고 "식민지 거리를 떠도는 '부랑아'들을 사랑과 헌신으로 돌봐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들어"간다는 미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해방과 6·25 전쟁, 급속한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부랑아'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제약은 더 공고해졌다. 한국 사회가 근대화라는 이름하에 변신을 거듭할 때, 거기서 튕겨 나온 수많은 존재들이 '깨끗하고 명랑한' 사회를 재구성하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생계운영의 능력을 상실한 가구이며, 사회적으로 위해한 인구, (…) 별도로 관리되고 특별하게 수용될 필요가 있는 대상, 국가 분할 통치의 직접적 상대"로 명명되었다.

전규찬은 "거리의 규율과 사회 질서, 생활 기강을 강조한 박정희 파시즘과 유신독재, 전두환 독재의 시간"을 거치면서 이 같은 통념의 질서가 어떻게 공고한 위계를 갖추게 되었는지 촘촘하게 분석한다. 5·16 쿠데타, 유신 선포, 비상계엄령, 새마을정화운동,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생활올림픽추진단' 등을 거치면서, "국가가 발령한 치안의 '훈령'에 기반하여 도시 인구를 대거 수용한" 형제복지원 같은 지옥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지배했던 한국에서 복지원은 "준-군사적 예외상태, 준-병영적 예외시설"이자 "도시 안에 마련된 근대에의 입영"을 의미한다. 영문도 모른 채 이곳으로 끌려온 도시 빈민과 노동자, 뿌리 뽑힌 자들은 이유도 물을 수 없는 무지막지한 폭력 아래서 "일점 구령과 전체 복창의 질서", 인간의 소리가 아닌 "야수의 울음이며 짐승의 비명소리"로 존재 자체를 축소당했다. "기합과 폭력은 복지원/수용소를 비명의 공간으로 점철한다." 악악, 윽윽, 아이구.

군사화한 복지원은 군사정권이 차지한 폭력적 국가의 미시축약형에 다름 아니며, 그 마이크로 폭력 스테이트의 야만적 행태는 유사한 수용소 레짐에서 그대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복지원/수용소의 문제는 반드시 보다 거시적인 한국 현대성의 일그러진 특징과 결부시켜 깊이 사유할 필요가 있다.

전규찬은 계속 질문을 던진다. 아우슈비츠 등지의 수용소에 대한 관심은 한국에서도 높은 편인데 왜 국내에 실존했던 수용소에 대해서는 눈길을 돌리냐고, 왜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를 지향하자'고만 하냐고, 왜 '시킨 대로 했을 뿐이다, 나도 피해자다' 혹은 '당시 법이 그랬으니 누가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었겠냐,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라고만 하냐고.

혹은, 이것이 나와 상관없는 과거의 비극일 뿐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 모습이 썩 만족스러운 건 아니지만 언젠간 긍정의 힘으로 지금의 답답증을 돌파하리라, 결코 '부랑아'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정일준 옮김, 새물결 펴냄)에서 미켈란젤로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품들이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었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간단합니다. 먼저 대리석판 한 개를 골라 불필요한 부분을 모두 깎아내면 됩니다."
르네상스의 전성기에 미켈란젤로는 현대의 창조를 이끌게 될 계율을 선포한 셈이다. 쓰레기의 분리와 파괴는 현대적 창조의 비법이 되었다. 여분의, 불필요한, 쓸모없는 것을 잘라내 버림으로써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만족스럽고 좋은 것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형제복지원에 수용되었던 이들이 사회의 생산력에 기여하는 가치 있는 노동 자원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가치한 '쓰레기' 취급받는 것이 당연하다면, 지금 사회에 넘쳐나는 '잉여'를 (농담처럼) 자처하는 수많은 이들 역시 그만큼이나 무가치한 존재라는 점을 상기하자. 형제복지원이라는 물리적인 건물에 수용되지 않았을 뿐, '잉여'들은 이미 "일하지 않고 놀면서 도시를 떠도는 (주거부정, 신원미상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사회적 인식에 포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인식이 사회적 합의로 이어지고, 구체적인 '실행'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면 그때 나와 당신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은 '하나 되는 대한민국'의 성립을 위해 아주 간단하게 분리될 것이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반드시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치를 달성한다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형제복지원의 생존자인 한종선은 '부끄러운 익명'으로 남기를 거부했다. 얼굴과 이름을 밝히면서 증언을 시작했고,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다. 질문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그렇다면 '조화로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분리될 것이 틀림없는 99퍼센트의 '잉여'들은 어떤 식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형제복지원은 얼마 전 사퇴한 김용준 총리지명자의 과거사에 얽혀 불현듯 많은 뉴스에 그 이름을 올렸다. 김용준 총리지명자가 대법관이던 시절, 그가 재판장으로 맡았던 사건 중 형제복지원 사건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복지원의 취침시간에 자물쇠로 출입문을 잠그고 행동의 자유를 제한한 것은 사회복지사업법 등 법령에 따른 정당한 직무행위로 감금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원장에게 특정경제가중처벌법위반(횡령)죄만 적용, 2년 4개월 형을 선고했다. (…) 당시 이 재판은 검찰이 살인죄 등의 혐의는 빼고 기소하면서 사회적 비판을 받았다. 이런 재판에서 재판부가 감금죄까지 적용시키지 않다보니 피의자의 형량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바로가기☞ "'사회적 약자' 상징이라던 김용준 후보, 알고 보니…")

김용준 총리지명자가 사퇴했다는 것이 어떤 '승리'처럼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많이, <살아남은 아이>를 읽어야 하고, 사회복지시설이 곧잘 봉착하고 마는 악의 유혹에 대한 해명을 줄기차게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한종선의 절실한 마지막 부탁에 응답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만으로는,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것만큼이나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김용언 기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_facebook.asp?article_num=50130201120148







Posted by 미메시스 미메시스TV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국가폭력과 트라우마에 대한 예술적 기억과 성찰 by 미메시스TV

카테고리

전체보기 (440)
day by day (90)
about 전승일 (2)
전승일_고양 금정굴 연작 (19)
전승일_그림_시즌5 (8)
전승일_그림_시즌4 (20)
전승일_그림_시즌3 (14)
전승일_그림_시즌2 (28)
전승일_그림_시즌1 (15)
전승일_공공미술 (2)
전승일_전시&상영 (31)
전승일_트라우마 (0)
전승일_글 (4)
전승일_애니메이션 (9)
전승일_다큐멘터리 (1)
전승일_인터뷰_기사 (2)
전승일_가족_꿈 (0)
자료_애니다큐 (9)
자료_아! 예술이네 (23)
자료_다큐만화_그림책 (6)
자료_형제복지원 사건 (29)
자료_국가폭력 트라우마 (31)
자료_제노사이드 (14)
자료_정신장애 (12)
음악_Pink Floyd (16)
음악 (47)
archives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