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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후유증 화가 이상호

자료/자료_국가폭력 트라우마

by 미메시스TV 2015. 9. 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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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해져 해마다 옛 망월동서 걸개그림전 열고파”


화가 이상호씨. 사진 최성욱 다큐감독
화가 이상호씨. 사진 최성욱 다큐감독
병마 속 첫 개인전 민중미술가 이상호씨

두 평 반 크기의 방에 놓인 목판이 눈에 띄었다. 지난 3일 아침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 선덕사 3층 작업실에서 만난 화가 이상호(55)씨에게 목판화 이야기부터 물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완성한 <죽창가>(72×54㎝)라는 작품이다. 낫을 들고 죽창을 만드는 민초의 눈에 시대의 분노가 녹아 있다. “밤낮없이 시위 현장에서 싸우고 시간이 날 때마다 작업실로 가 나무에 새겼지요.” 이씨는 10~16일 광주시 동구 디에스갤러리에서 ‘역사의 길목에 서서’라는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연다.


<그만 좀 쫓아와라!>(1987) 등 판화와 걸개그림뿐 아니라 <동학농민군의 식사>(1994), <통일염원도>(2014) 같은 회화 등 모두 4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노모(83)는 늘 “싸우는 그림을 그리더라도 인정있게 그려라, 잉~” 하고 조언한다.


이씨는 6월 항쟁 때 처음으로 경찰에 잡혀갔다. 조선대 미대에 재학 중이던 이씨는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가 대공과에서 정신없이 두들겨 맞았다. 그러다가 한 형사가 하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라는 것을 들먹이던 형사가 ‘니 아버지는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뽑고, 너는 (전두환을) 물러가라고 해야?’라며 빈정댔다. 이씨는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아침에 일어나 (경찰서) 이 방 저 방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고 해요. 경찰에서 (겁이 났는지) 훈방해 아파트에 밀어넣고 갔어요.”


10~16일 광주서 ‘역사의 길목에…’
판화·걸개그림·회화 40여점 선봬
6월항쟁 뒤 성조기 찢는 그림 그려
남영동서 고문겪고 보안법 위반 구속
후유증에 매년 정신병원 오가


87년 8월 두번째로 경찰에 끌려갔다. 전정호와 공동제작한 걸개그림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라는 작품 때문이다. 노동자와 농민이 미국의 성조기를 찢는 장면이 빌미가 됐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폭행과 고문에 시달렸다. 이씨는 “형사 한 놈이 욕조가 있는 조사실로 데려가 팬티만 입게 한 채 세워놓고 ‘박종철이 죽은 곳이다’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다음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그는 요즘 고려 불화에 관심이 많다. 93년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고려불화전을 본 뒤 마음을 뺏겼다.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하는 화승의 정성이 깊게 스민 작품”에 매료돼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러다가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예능보유자였던 만봉 스님을 찾아가 6개월 남짓 밑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다.


그는 꿈속에서 교도소 배식구에 손을 넣고는 군복 입은 박정희에게 “손목을 자르라”고 소리치는 악몽에 시달리곤 한다. 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시민군이 되어 쫓기다 잠을 깨기도 한다. 더 무서운 고통은 “병원에 들어가는 꿈”이다. 그는 젊은 시절 겪은 고문 등의 후유증 탓에 요즘도 1년에 한 차례 정신병원에 입원해 2~3개월 정도 지낸다. 전시작 <첫눈 오는 날>(2005)을 보노라면, 정신병원에서 창문 철창을 잡은 채 무릎을 꿇고 있는 환자의 뒷모습이 진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그곳에 있을 때 퇴원하는 환우들을 위해 초상을 스케치해 선물해요. ‘다시는 아프지 말고 다시는 여기서 보지 말자’며 초상화를 건네줘요….”


그는 “건강해져서 해마다 5월에 80년 5월 희생자들이 처음 묻혔던 옛 망월동에서 걸개그림전을 지속적으로 여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박구용 전남대 교수(철학·미학)는 “80년대를 떠나지 않고 그때 동지들과 함께했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는 ‘날개 잃은 이 시대의 천사’”라고 도록 서문에 적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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