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시위 이후, 젊은 만화가들은 왜 현실에 눈을 돌렸나
르포서 풍자까지 다양한 형식의 반란
만화가 박건웅씨는 2008년 5월을 잊을 수 없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저지’를 위한 촛불시위 현장에 있던 그는 시위 도중 수십명의 전경에게 군홧발 세례를 받았다. 아스팔트에 머리를 부딪힌 뒤 정신을 잃은 그가 깨어난 곳은 병원이었다. 뇌진탕 증세를 보인 그는 4일간 입원했고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잠만 잤다.
이후 6개월간 아무것도 그릴 수 없었다. 펜을 손에 들면 무기력감과 우울증이 밀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꿨다. 하나님 믿고 회개한 연쇄살인범, 성폭행범, 고문기술자, 부정하게 돈을 모은 부자가 천국에 가서 그곳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반면 믿음이 부족하다는 판정을 받거나 난장판이 된 천국을 탈출한 사람들이 모인 지옥에는 오히려 새로운 희망이 싹텄다. 결국 천국과 지옥은 뒤바뀌었다. 박건웅 작가는 이 내용을 만화로 그려 경향신문 블로그에 연재했고, 다시 <삽질의 시대>(사계절)로 묶어냈다. 그는 “이전에도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었지만 주로 과거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해왔다”며 “촛불시위 이후 당대 현실 문제를 직접 그리게 됐다”고 말했다.
박건웅 작가의 사례는 최근 한국 만화의 한 경향을 보여준다. 어린이용 학습만화와 인터넷 포털 연재용 웹툰으로 나뉜 한국 만화 시장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비판하는 작품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사건을 정밀하게 취재해 사실적으로 그리는 르포 만화부터 <삽질의 시대>처럼 풍자적이고 그로테스크한 표현주의까지 형식도 다양하다.
<내가 살던 용산>(보리·2010)은 최근 르포 만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용산참사 1주기를 맞아 제작된 이 작품에는 김홍모·앙꼬·유승하씨 등 6명의 젊은 만화가가 참여했다. 작가들은 용산에서 사망한 철거민 5명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그들이 왜 망루에 올라가야 했는지를 취재해 그렸다. 수감자를 면회하고, 편지를 주고받고, 영안실과 참사 현장을 찾아 유가족의 이야기를 들었다.
르포 만화는 한국 출판 시장에서는 생소한 형식이지만, <내가 살던 용산>은 1만부 가까운 판매 실적을 보이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최근에는 삼성 반도체 공장과 그곳에서 죽어나간 노동자들을 그린 만화 2종이 나란히 나왔다. 김수박 작가의 <사람 냄새>(보리)와 김성희 작가의 <먼지 없는 방>(보리)이다. 유족의 증언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되살렸고, 반도체 공장 내부의 사정을 정밀하게 묘사했다.
왜 한국의 젊은 만화가들은 현실에 눈을 돌렸을까. 우선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고 민주주의가 훼손된 이명박 정부의 현실이 만화가들을 자극했다는 분석이 있다. 김홍모 작가는 “용산참사 현장에 많이 들렀고 이를 어떻게 만화로 알릴까 고민만 하는 사이 내 안에 있는 분노가 사그라지고 있다는 느낌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서둘러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출판사가 나서기도 전에 김 작가가 먼저 동료를 섭외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작가가 선뜻 제안에 응했다. 김 작가는 “철거민의 정당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가진 동료도 있었는데, 취재 과정에서 많이 변했다. 이후 이쪽 일에 더욱 적극적이 됐다”고 전했다. 김태희 사계절 편집팀장은 “촛불시위 이후, 문화 사업을 표방하는 출판이 현실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 비겁하다고 느꼈다”며 “처음엔 기획이 무산되기도 했지만 결국 최규석·박건웅 작가 등을 섭외해 현실에 대해 촌철살인의 깨달음을 주는 ‘1318 만화가 열전’을 기획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만화 무크지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내고 있는 위원석 휴머니스트 교양만화 주간은 “만화가들은 4대강 반대 집회에서도 많은 일을 하는 등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목소리를 내왔다”며 “그런 역량이 출판사와 결합하면서 사회에 대한 묵혀 있던 불만이 표출됐다”고 말했다.
실제 요즘 만화가들은 작품활동 이외에도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을 마다하지 않는다. 시위 현장에 나서는가 하면,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한다. 최호철·강풀·주호민씨 등 인기 만화가, 평론가, 스토리 작가 233명은 지난 10일 국민일보, MBC, KBS, 연합뉴스, YTN 등 언론사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범만화인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문을 토대로 한 릴레이 만화 시국선언도 기획하고 있다.
최근 한국 만화의 경향은 영화, 문학 등 인접 장르와도 비교된다. 대기업 계열 투자·제작사 위주로 재편된 영화계는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상업영화 위주로 흘러가고 있다. 독립영화 진영이 끝없이 사회 현실을 일깨우고 있긴 하지만, 배급과 마케팅 환경 등이 열악해 입지가 축소되고 있다. 문학은 신경숙·공지영씨 등 일부 인기 작가를 제외하고는 대중과의 접점을 차츰 잃어가고 있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일본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소설이 계몽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분석했다”며 “17~18세기 풍자화에서 시작했으나 이후 장르 만화, 우스개 만화로 발전해간 만화는 오히려 옛 전통을 되살려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만화는 풍자, 상상력이 기본인데 이는 현 정권의 코드와 극점에 있다”고 말했다. 위원석 주간은 “만화는 대중 예술, 거리 예술이라는 출발점을 갖고 있기에 만화를 소비하는 대중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분석했다.
출판사도 어렵고 복잡한 현실을 쉽게 전달하는 만화에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인문서, 사회과학서에 바로 돌입하기 어려운 독자층을 공략하기에는 만화가 적합하다는 것이다. 유문숙 보리출판사 실장은 “애초엔 사회 전반의 구조적 문제를 어린이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 만화, 그림책 시리즈인 ‘평화 발자국’을 기획했으나, 곧 청소년이나 성인 독자층도 염두에 두는 것으로 기획 의도를 확대했다”며 “무거운 주제를 시각적으로 설득력있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만화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살던 용산> 정도를 제외하고는 아직 이들 현실비판적인 만화가 대중의 폭넓은 호응을 얻고 있진 못하다. 2권까지 나온 <사람 사는 이야기> 역시 기대보다 판매 실적이 좋지 않아 향후의 편집 방침을 고민하는 단계다.
이 같은 만화가 최근 한국 만화의 주요 유통 경로인 포털사이트의 웹툰으로 소비되기엔 힘들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이념적으로 무색무취함을 요구당하고 있는 포털사이트들은 정권, 대기업, 권력층을 비판하는 만화를 게재하기 어렵다. 게다가 최근엔 수구언론들이 학교폭력 사태의 원인으로 웹툰을 지목하자,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서둘러 심의에 나서는 등 ‘마녀사냥’까지 벌어진 상황이다. 이 같은 분위기에선 취재와 작업에 시간이 많이 드는 사회 비판적인 만화의 재생산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만화가들은 대부분 어린이용 학습만화, 그림책 등의 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한 뒤 남는 시간을 이용해 사회 비판적인 개인 작업을 하고 있다.
박인하 교수는 “최근 만화가들의 작업은 의미가 있지만 아직 대중적으로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같은 주제라 하더라도 더욱 만화적인 언어, 구성, 특징을 만들어내거나 보수적인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벗어나 기존 언론사의 웹사이트에 연재하는 방식을 택한다면 대중적으로도 더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건웅 작가는 “개인 작업을 하는 만화가들은 사실 매우 정치적이지 않은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까지 나서 시국선언을 한다면 대체 세상이 어느 정도로 나쁘다는 이야기냐”라고 되물은 뒤 “풍자는 약자 최후의 무기”라고 말했다.
2012. 6. 1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6152129305&code=9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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