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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신기철)

전승일_그림 모음/전승일_고양 금정굴 연작

by 미메시스TV 2012. 6. 1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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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출신인 저자는 지난 10여 년간 수집해온 증언자료와 조사기록 등을 묶어서 고양 금정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 이 책은 한국전쟁 시기 부역 혐의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 문제를 가장 심층적으로 조사·분석한 매우 귀중한 저술이라 하겠다.

책 속에서 밝힌 사건의 배경과 학살의 전모, 희생자의 유형과 가해자의 실체, 그리고 유족들이 받았던 피해사례 등은 한국전쟁 당시 광범위하게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전체 실상을 알려주기에 손색이 없다. 금정굴 사건을 통해 낱낱이 드러난 사례들은 곧 전국적으로 자행된 학살사건의 실체라 할 것이다.

특히 저자가 직접 채록한 증언들은 반세기 이상 참담한 역사를 외면하고 부정해 왔던 우리들의 체부를 아프게 찌르고 있다. 신 전 팀장은 희생자와 가해자들의 기억과 증언과 관련된 내용들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건조한 문체로 정리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역사적 망각을 되돌리기에 충분할 만큼 생생하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출신이 공개하는
최초의 진실·화해 보고서!

지난해 12월 3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됐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5년 동안 총 1만 1,000여 건의 사건을 조사 완료했고, 이중 8,500여 건을 진실 규명했다.
하지만 이런 외형적 ‘성과’와 달리 진실화해위원회는 활동 종료 시점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명박 정부로의 정권교체 이후 그간의 조사활동이 이념 논란으로 변질되는 후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급기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등 피해 유족단체들이 진실화해위원회의 종합보고서가 부실한 내용으로 학살자들에게 면죄부를 줬다며 성토하고 나섰고, 학계에서도 보고서가 군경과 좌익에 의한 희생을 병렬적으로 기술해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의도적 폭력이란 성격을 희석시켰다는 비판이 나왔다. 또한 미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도 미국 쪽 설명 위주로 기술해 희생의 불가피성을 부각시켰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마디로 ‘진실’ 없는 진실화해위원회란 지적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마음이 착잡한 이들은 조사를 직접 담당했던 일선의 조사관들일 것이다.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2국 조사1팀장 역시 마찬가지다. 고양시 금정굴 민간인 학살사건을 담당했던 그는 진실도 화해도 이루지 못한 지난 5년간의 활동에 대해 많은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가 이 책을 출간한 동기 역시 그와 같은 착잡함과 아쉬움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진실과 화해를 위해’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출신이 최초로 공개하는 진정한 의미의 조사보고서라 할 수 있다.

고양 금정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최초의 심층 보고서


한국전쟁 시기 수많은 민간인들이 무고하게 학살되었다. 참으로 참혹하고 비극적인 희생이었다. 한국전쟁은 전 국토가 뒤섞인 전쟁터였고, 밤낮으로 점령군이 바뀌었다. 점령군이 좌우익으로 교체될 때마다 응징 보복의 학살이 마치 톱질하듯이 번갈아 자행되었다.
특히 수복해 들어온 남한의 군대, 경찰, 우익단체에 의한 보복학살은 오랜 시간 동안 그 진실이 드러나지 못했다. 인민군 편에 가담했거나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협력했던 사람들은 ‘부역자’로 낙인 찍혀 학살 대상이 되었다. 적군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부역혐의를 뒤집어쓴 채 야만적으로 학살당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금정굴 사건 역시 마찬가지이다. 금정굴 사건은 서울 수복 직후인 1950년 10월 고양경찰서 소속 경찰관, 의용경찰대, 태극단(6·25전쟁 당시 고양지역에서 결성된 반공청년조직)이 최소 153명의 주민을 부역자로 몰아 고양지역의 한 폐광인 금정굴에서 총살한 사건이다.
하지만 금정굴 사건은 발생일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나도록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고, 피해 유족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지난날 학살을 주도했던 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한국 사회를 좌우해 오면서 그들은 희생자와 그 가족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씌웠고, 침묵을 강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 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민간인 학살의 실체도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피해 유족들은 강요당한 침묵에서 벗어나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섰고,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금정굴 사건 역시 1995년 10월 희생자들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활동이 본격화됐다.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 때부터 진실 규명을 위한 노력을 벌였던 신기철 전 조사관은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에 참여한 뒤 본격적으로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매달려 왔다. 마침내 그는 2007년 “금정굴 사건은 당시 고양경찰서장 책임 아래 자행된 집단살해이며, 그 최종 책임은 국가에 귀속된다”는 <진실화해위원회 1차 보고서>를 통해 진실에 다가설 수 있었다. 또한 국가가 유해를 봉안할 수 있는 추모시설 설치 등을 신속히 처리할 것을 권고문에 담아내는 성과를 얻었다. 그 후에도 신 전 조사관은 2009년 국가기록원의 보존 자료를 통해 금정굴 사건 당시 고양경찰서에서 조직적으로 학살에 개입한 사실을 증언하는 문서를 확보하기도 했다. 이는 학살의 주체를 확증하는 자료이자, 일선 경찰서의 단독 행동이 아니라 그 윗선의 조직적 개입을 확인할 수 있는 단초였다.
하지만 2008년 정권 교체 이후 금정굴 사건의 진실 규명 활동은 벽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1995년 발굴된 금정굴 사건 피해자들의 유해는 16년이 지나도록 서울대병원 법의학교실에 방치되어 있고, 애초 진실화해위원회가 1차 보고서에서 권고한 추모시설 설치는 현재까지도 아무런 진척사항이 없는 실정이다. 또한 새로운 조사 내용이 드러났지만 이를 반영하는 2차 보고서는 끝내 채택되지 못했다.
결국 신 전 조사관은 지난 10여 년간 수집해온 증언자료와 조사기록 등을 묶어서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라는 책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이 종료된 지 두 달이 되는 시점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제노사이드의 실상을 알려주는
최초의 역사 기록서


신 전 팀장은 금정굴 사건의 진실 규명을 위해 그동안 각종 공공기록을 세밀히 수집하여 검토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회고록·증언록들을 낱낱이 검토했고, 생존해 있는 관련 인물들을 일일이 찾아 생생한 증언을 청취했다. 또한 관련 학술연구물은 물론 미국 측의 자료들까지 조사하여 제시했다. 그는 이처럼 매우 공들여 조사한 다양하고 풍부한 관련 자료들을 원고지 1,800매라는 방대한 분량의 내용으로 정리해냈다.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는 주로 고양 금정굴 민간인 학살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에서 밝힌 사건의 배경과 학살의 전모, 희생자의 유형과 가해자의 실체, 그리고 유족들이 받았던 피해사례 등은 한국전쟁 당시 광범위하게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전체 실상을 알려주기에 손색이 없다. 금정굴 사건을 통해 낱낱이 드러난 사례들은 곧 전국적으로 자행된 학살사건의 실체라 할 것이다. 특히 신 전 팀장이 채록한 증언들은 반세기 이상 참담한 역사를 외면하고 부정해 왔던 우리들의 체부를 아프게 찌르고 있다. 신 전 팀장은 희생자와 가해자들의 기억과 증언과 관련된 내용들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건조한 문체로 정리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역사적 망각을 되돌리기에 충분할 만큼 생생하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 대해 역사학계의 참스승이라 할 이이화 선생은 “금정굴 사건이라는 하나의 진실을 통해 광란의 시대에 저질러진 ‘제노사이드(genocide)’ 전체의 실상을 알려주는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는 한국전쟁 시기 부역 혐의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 문제를 가장 심층적으로 조사·분석한 매우 귀중한 저술이라 하겠다.

 

 

 

"서울대병원에 16년째 방치된 유골, 부끄럽다"
[인터뷰]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쓴 신기철 '금정굴사건' 전 진실위 조사팀장
김성수 (wadans) 기자

한국전쟁 초기 한강 다리를 몰래 끊고 도망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은 자기의 "서울을 사수한다"는 말만 믿고 서울에 잔류한 민간인들에게 위로나 사과가 아닌 무자비한 집단학살로 보답한다. 역사에 '적반하장'의 예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람은 이승만일 것이다.

 

1950년 10월 9일부터 10월 25일 사이, 153명의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들은 경찰에 의해 고양시 금정굴에서 집단학살을 당한다. 당시 고양시에서만 최소 천 명의 민간인들이 법적 절차도 없이 희생당했다. 희생자들 대부분은 소극적 부역자나 부역과 무관한 그 가족 등이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이승만 정부가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상황에서 인민군이 총을 들이대고 "밥을 달라, 일을 해라" 하는데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었겠나. 그러나 도망갔다 돌아온 이승만 정권은 이런 민간인들을 오히려 '빨갱이 부역자'로 몰아 학살했다. 학살사건 이후에도 희생자 가족들은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국가에 재산을 빼앗겼다. 연좌제로 취업도 어려웠고,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집요하게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1995년 금정굴사건 희생자 유족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힘으로 금정굴에서 희생자 유골을 발굴했다. 유골에는 여성과 아이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도 상당수 있었다. 학살 당시 금정굴에서는 희생자들을 굴 방향으로 무릎을 꿇게 하고 등 뒤에서 사격, 살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책표지
ⓒ 자리
국가범죄

2007년 6월 진실화해위원회(이하 진실위)는 금정굴에서 국가가 저지른 전쟁범죄에 의해 고양지역 주민들이 희생되었다고 규명한 바 있다. 가해책임은 고양시 경찰관과 경찰의 지휘를 받으며 보조역할을 수행한 당시 우익단체에도 간접책임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진실위는 2007년 관련기록 수정, 희생자 유족에 대한 국가사과, 임시 보관 중인 유해 영구봉안, 위령시설 설치, 관련법률 정비, 역사관 건립 등을 국가에 권고했다.

 

그 후 4년이 가까워져 오도록 국가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그래서 국가가 진실을 밝혔음에도 지금도 희생자 유해는 16년째 서울대병원창고에 '임시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 창고조차도 서울대병원이 재건축을 한다고 올해 안에 유해를 옮길 것을 요구했다. 유가족들은 지금 하루하루 속이 바짝 타 타들어 간다.

 

신기철씨는 진실위에서 금정굴사건을 조사한 조사팀장이었다. 그는 진실위 조사관 중 처음으로 금정굴사건에 대한 책,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 고양 금정굴사건으로 본 민간인 학살>을 발간했다. 다음은 지난 2월 중 신기철씨와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서슬 퍼런 남과 북의 국가권력 앞에선 모두 나약한 개인들이었을 뿐"

 

  
신기철씨.
ⓒ 신기철
신기철

- 진실위에서 금정굴사건보고서를 2007년에 냈는데 이번에 단행본 책을 따로 발간하게 된 동기나 이유가 있나?

"금정굴사건 보고서는 민간인 학살사건으로서는 나주 동박굴재 사건에 이어 두 번째 것이었다. 당시 위원회 활동의 성과가 뭔지 보여 달라는 독촉이 심하던 때여서 서두른 점이 있었고, 그래서 부족한 점이 많았다. 보고서의 분량 때문에 내가 담고 싶었던 내용 중 많은 부분이 누락되기도 했다. 보고서를 낸 이후 새롭게 확인된 사실들도 담아내고 싶었다. 단행본으로 책을 따로 내게 된 것은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의 후속작업으로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신기철씨 약력

1983년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1990년 ~ 1997년  서울 남부금속 노동조합

1997년 ~ 2003년  고양시민회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년 ~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 책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금정굴 사건이 저질러지게 된 전국적 맥락 또는 경기도 단위의 맥락이 채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국내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사회과학적 연구도 찾을 수 없었다. 고양지역에서도 고양경찰서 외에는 경찰조직이 어떻게 개입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다른 나라 사례를 참고로 몇 가지 시도를 하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객관적 사실의 열거 외에 별다른 해석을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욕심이 지나쳤던 것이다."

 

- 금정굴사건에 대해선 기존에 나온 몇몇 글이 있지만 부역혐의 희생사건의 유형으로는 처음 정리된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의의와 주요 내용을 소개하면?

"이 책을 통해 국가가 사건 발생 직후부터 고양 금정굴 사건을 알고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숨겨왔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 검찰 스스로가 200여 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전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60년이 넘도록 직간접으로 희생자들의 가족들을 괴롭혔다. 이건 파렴치의 수준을 넘어서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래서는 국가가 조직폭력배 집단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아직도 좌우 갈등의 문제로 바라보는 편견을 바로 잡고자 했다. 학살에 가담한 고양경찰서 의용경찰대원 상당수가 부역자였다. 물론 이들도 전쟁 전에는 대한청년단원, 대동청년단원, 국민보도연맹원들이었다. 반면 희생자들 역시 대한청년단원, 호국군, 마을 반장, 마을 유지들이었다. 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전쟁 전에는 모두 한 마을 주민들이었다. 과연 누가 좌익이고 누가 우익이었다는 말인가? 서슬 퍼런 남과 북의 국가권력 앞에선 모두 나약한 개인들이었을 뿐이었다.

 

이 책은 '부역혐의 희생사건'을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다른 유형의 학살사건도 마찬가지이지만 입에 담기조차 꺼려했던 사건들이다 보니 희생 시기나 희생경위처럼 진실의 기본이 되는 '객관적 사실'조차도 정확하질 않다. '망각'이라는 일종의 자기방어인 셈이다. '부역혐의 희생사건'의 '객관적 사실'을 명확히 한 후에야, 전국에 이와 같은 일이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고양금정굴 사건을 조금 더 자세히 다루었을 뿐이며, 이 정도의 내용은 전국 어느 시·군·구에서도 확인되는 사건이다. 북한 사회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아직도 이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있는 곳이 아주 많이 있다. 이것이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중 하나다."

 

- 1995년 10월 유족들의 힘으로 금정굴을 발굴했고, 2007년 진실위에서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규명했다. 그 후 가해자들의 반성이나 고백이 있었나?

"2008년 경찰청장 명의의 유감 표명은 있었다. 2007년 진실규명 당시 태극단원의 증언이 진실규명에 크게 도움이 되었지만 본인들의 행위에 대해선 모든 진실을 말하진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희생자 유골을 안치하는 데 반대하는 것을 보면 결코 반성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 사건에 대한 위령사업을 공약으로 내걸어 당선된 고양시장도 별다른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의 편견을 넘어서려고도, 더 이상 진실을 알려고도 하질 않는다"

 

  
금정굴현장
ⓒ 신기철
금정굴

- '학살' 인정을 위한 싸움도 여전히 진행 중인데, 전 고양시장은 국가에서 진실규명한사건 임에도 금정굴 위령사업을 왜 반대했나?

"고양시장이 반대한 이유는 태극단 등 민간단체가 반대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다만 내가 면담한 바로는 이 사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태극단은 그리 크게 반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보훈단체들의 견해였는데 이 단체들은 이 사건 희생자들이 좌익 활동으로 처단된 것이므로 위령사업이 곧 좌익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분들은 자신들의 편견을 넘어서려고도, 더 이상 진실을 알려고도 하질 않는다. 이 영향이 현 시장에게도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보도연맹사건 등을 비롯해 한국전쟁 당시 거의 무차별적 민간인학살을 보면 요즘 구제역사건으로 가축을 '무작위'로 살처분, 생매장 하는 것과 너무 유사한 양상이다. 당시 이런 무자비한 민간인학살을 통해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집단이 있었나?

"이승만 집단이었다고 본다. 이승만을 지지했던 정치집단조차도 전쟁 후 배척당하는 것을 보면 가장 큰 이익을 본 집단이 당시 정부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결국 이승만 일인을 중심으로 한 일개 정치 파벌이 아니었나 싶다. 최근까지 연장해서 본다면 아마 국가보안법과 미국으로 상징되는 초헌법 집단이었겠다."

 

- 16년 동안 방치되었던 유골의 안치는 가해자 국가가 먼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라고 본다. 진실규명사건임에도 왜 아직까지 희생자유골이 제대로 된 시설에 모셔지지 못하고 병원 창고 같은 임시시설에 보관되어있다고 보나?

"진실화해위원회가 발굴한 유골도 어쩌지 못하고 임시보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유족들이 직접 발굴한 금정굴사건 유골이 서울대병원에 보관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인지 모르겠다. 유족들로서는 서울대 이윤성 교수님께 너무 감사드리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후손된 도리로서 너무 부끄러운 일로 여기고 있다. 어떻게 해보려는 고양시장으로서도 이명박 정부가 기피하고 있는 일을 일개 지자체에서 하려니 쉬운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본다."

 

- 그동안 금정굴사건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등의 명예회복과 화해를 위한 국가의 조치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나? 일부 유족들은 2010년 6월 국가배상소송을 했는데 진전이 있나?

"현재 국가배상 소송이 진행 중에 있다. 담당 재판부는 사건의 실체에 대해 다루어 보려고 하는 반면 피고로 나선 고양경찰서 경찰관들은 소멸시효만을 주장하고 있는 형편이다."

 

- 금정굴 외에도 고양시 성석동 등에도 많은 시신이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는데, 고양시의 학살 추정지 현황을 이야기하면?

"직접 목격한 분들의 증언이므로 성석동에 20여 구가 매장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현천리의 시신은 봉분이 조성되어 있어 발굴의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한강변 희생지와 화전리는 매장한 것이 아니므로 현재 발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본다."

 

"문제는 당시의 잣대에 대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 책에서 "학살은 이승만 '정치의 수단'이었고 '집권세력의 광기'에서 발생한 정치적 결과" 였다고 정의했는데 좀 부가해서 설명하면?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이 워낙 잔인하고 비이성적이므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흔히 있었다. 이는 설명할 수 있는 자료에 접근하기도 어렵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희생자 유족 등 증언 가능한 사람들을 면담하기 어려운 사정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지난 5년간의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한 내용이 있다. 이를 근거로 볼 때 이승만 정부는 정치적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학살을 저질렀다고 보는 것이다."

 

- 2008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울산국민보도연맹사건에 대해 국가차원의 사죄를 했다. 그리고 매년 위령제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해 군과 경찰이 사과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부역자 명부', '처형자 명부'는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나로서는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겠다. 그러니 사과가 말로 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역자나 처형자 명부들은 진실화해위원회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도 결정적인 자료에 해당하지만 볼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 책에서, 60년 전보다 시민사회는 진보했으나 이념과 제도는 달라진 것이 없고, 그래서 후손들에게 물려 줄 대한민국은 여전히 위험해 보인다고 했는데, 금정굴사건 조사팀장 입장에서 고양시장과 이명박 정부에 건의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념적 관점에서 벗어나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았으면 좋겠다. 흔히 '지금의 잣대로 재지 마라'고들 한다. 그럼 당시의 잣대로라도 보라고 권하고 싶다. 문제는 당시의 잣대에 대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어쨌든, 이 사안에 대해서는 이명박 정부와 고양시장에게 건의하거나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잔학했던 국가범죄에 대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회정의를 위해서, 사회통합을 위해서 당당하게 관철해 나가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책,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 고양 금정굴사건으로 본 민간인 학살>(출판사 : 자리, 464쪽, 28,000원)

2011.03.04 09:27 ⓒ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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