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한 컷>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

 

 

전승일

 

 

 

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과 복원된 ‘운동화’

 

 

1987년 6월 9일

 

교문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는 한 달여 동안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뇌손상과 폐렴에 따른 심폐기능정지로 끝내 숨을 거두었고

100만여 명의 추모 인파가 모인 가운데

 

7월 9일 ‘민주국민장’이 치러졌다.

 

‘李韓烈군 永訣... 추도人波 100만’이라는 제호의

<조선일보> 87년 7월 10일자 1면은

동판으로 제작되어 배은심 어머니께 전달되었고

이 신문 동판은 현재 <이한열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87년 당시 연세대 시위 현장에서는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 한 쪽이 발견됐다

 

<이한열기념관>은 2015년에 이 낡고 심하게 훼손된 운동화를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에 의뢰하여 보존처리 작업을 하고 원 상태로 복원했다

 

복원된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는

유물번호 ‘A007140007’로 <이한열기념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한열 열사 운동화 복원 과정은

소설가 김숨에 의해 <L의 운동화>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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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4주기를 기리는 현대미술전시




도판 근태생각 제공
도판 근태생각 제공
가장 양심적인 민주주의자로 추앙받았던 고 김근태 전 민주당 의원(1947~2011)의 4주기를 기리는 현대미술작가들의 전시회가 서울시청 시민청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김근태를 생각하는 문화예술인 모임 ‘근태생각’이 18일부터 열고있는 4주기 추모전 ‘포스트 트라우마(POST TRAUMA)’ 전이 그 작품마당이다. 미술사연구자 박계리씨와 큐레이터 구정화씨가 같이 기획한 이 전시는 전쟁, 분단의 역사적 상처가 현재도 아물지않은 우리 현실을 성찰한다는 취지 아래 만들어졌다. 남북한 평화체제의 전환이야말로 이땅에서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는 전제조건임을 역설했던 고인의 화두를 작가 8명이 회화, 영상, 설치, 퍼포먼스 등 작품 40여점으로 다채롭게 풀어냈다.

지난 5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영상물 <위로공단>으로 한국작가로는 처음 본상을 받은 임흥순씨는 탈북자 가수 김복주씨가 분단과 두고온 고향에 대해 느끼는 복잡한 심경을 그의 노래와 함께 풀어낸 영상작업을 선보였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올해의 작가’ 노순택 사진가는 2009년 용산참사 뒤 진상규명 투쟁현장을 찍은 사진 속에서 우연히 찾아낸 김 전 의원의 사진과 짧은 에세이를 묶어 고인을 새롭게 추억하는 작업을 내놓았다. 고인이 재야시절 대표를 지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의 옛 활동가 2세들과 함께 협업하면서 민청련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현재를 조명한 김월식,이부록 작가의 작품도 눈에 띈다. 이밖에 조습작가는 분단과 전쟁 희생자들의 원혼이 유령처럼 이승을 떠도는 모습을 표상한 사진작업을, 전승일 작가는 절벽에서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사람의 실루엣 그림(사진)을 통해 역사적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12월6일까지. 무료.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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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근태' 4주기 추모전


<포스트 트라우마 POST TRAUMA>



2015. 11. 18(수) ~ 2015. 12. 6(일)




시민청 갤러리 바로가기



네오룩 <포스트 트라우마>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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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달간 20만명 학살한 이승만, 친일파 처형은 0명"

[인터뷰②] <전쟁범죄> 펴낸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장




☞ 인터뷰 1편에서 이어집니다.

- 한국전쟁기 민간인들에 대해 일부 미군들이 저지른 행위는 '전쟁범죄'로 볼 수 있는가?
"'전쟁범죄'는 가해자 의도를 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폭격의 경우 가해자 의도를 피하기 위해 '부수적 피해'라는 용어가 개발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용어는 '아무나 죽어라' 하는 식이 될 수밖에 없는 '폭격'이나 '적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피난민간인을 살해하는 '토벌작전'을 합리화한다. 그러다 보니 이 자체가 전쟁범죄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한 번의 우발적인 사건이어도 문제가 있지만 학살이 반복되었다면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부수적 피해'와 '전쟁범죄'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민간인을 적으로 여기고 공격한 행위는 충분히 입증된다. 1950년 7월 26일 미 지상군이 자신들이 소개시킨 피난민임을 알면서도 공격했던 영동 노근리 사건은 이미 전 클린턴 대통령이 사과 비슷한 '유감' 표명을 했다.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사건이 1950년 7월 10일 연기군 서면 월하리에서 있었으며, 8월 12일에는 창원(마산)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씨 재실에서 피난하던 주민 86명이 미군에게 살해당했다. 기록을 보면 미군들은 희생자들이 모두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민군 점령 지역의 민간인이나 민간시설을 공격한 행위도 많았는데, 이를 전선의 이동과 비교해 보면 국민보도연맹사건과 미군폭격사건이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을 미군 항공기가 감시하는 모습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 한국전쟁 중 남쪽 민간인들이 입은 피해는 불가피한 '부수적 피해가'가 아니라 민간인학살이 이승만정권의 '주대상'이었다고 볼 수 있나? 
"전쟁기의 민간인피해를 대개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표현한다. 전쟁은 군인들 사이의 목숨을 건 경쟁이라고 보기 때문에 민간인들의 생명과 무관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이는 전쟁의 참상을 숨기기 위한 완곡어법에 지나지 않는다. 십자군전쟁 등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옛 전쟁에도 점령지역의 민간인을 몰살시키는 사례가 예외 없이 벌어졌다. 이는 오늘날의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나는 국방부의 <한국전쟁사1권> 39쪽에서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를 각각 사망, 부상, 실종으로 구분한 통계를 보고 놀랐다. 군인 경우 사망 22만 8천 명, 부상 71만 7천 명, 실종 4만 4천 명이고, 민간인의 경우 사망 37만 4천명, 부상 23만 명, 실종 38만 8천명이었다.

실종자를 모두 사망으로 볼 수 없겠지만 민간인학살 희생자 대부분이 실종처리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고 일단 사망자와 실종자 수를 합해 부상자 수와 비교해 보았다. 군인의 경우 사망실종자에 비해 부상자 수가 2.6배를 넘는 반면 민간인의 경우는 0.3배에 그친다.

전투를 치러야 하는 국군은 최소한의 자기 방어 장비를 갖추고 있고 작전상의 지휘자가 있으므로 부상자가 많은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민간인들의 사망과 부상이다. 단순히 본다면 부상자 비율이 매우 낮은 이유가 보호 장비가 없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국군의 경우와 북한지역의 경우를 비교한다면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온다.

전투와 관련 없는 민간인희생자 수가 국군보다 훨씬 크다. 27만 2천 명 대 76만 2천 명. 희생자 상당수는 부상이 없이 사망에 이르렀다. 폭격이 심했던 북한 경우 민간인 부상자는 사망실종자보다 1.6배에 이른다. 남한의 0.3배에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민간인이 군인보다 2.8배 더 희생되었으면서도 부상자 수는 오히려 0.32배였다. 그래서 남한의 민간인희생자 상당수가 전투에 따르는 '부수적 피해'가 아닌 '고의적 학살'에 의한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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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와 이승만.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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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기 남한 민간인 학살 희생자(혹은 피해자)의 규모를 '100만 명' 수준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지?
"먼저 상식처럼 알려져 있는 통계를 볼 수 있다. 제주나 여순, 이후 토벌작전으로 보아 전쟁 전 10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데 큰 이견은 없어 보인다.

국방부의 <한국전쟁사4권>, 760쪽에는 남한비상경비사령부가 1950년 6월부터 10월 사이에 106만 명의 민간인이 피살되었다고 발표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같은 책 1권 39쪽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나는 106만 명의 피살자 발표에 대해 이후 어떤 설명이나 반박의 경우를 못 봤던 것 같다.

한편, 4․19혁명 직후 전국유족회가 주장했다는 114만 명이 있다. 아직 이 근거를 확인한 바는 없지만 당시 이 통계를 유족회가 수집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전국유족회를 구성한 유족회는 대부분 영남지역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인데, 아마 이 통계는 정부 측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나는 부역자가 55만 명, 국민보도연맹원이 30만 명이라는 정부 측 자료나 인사들의 발언에 주목한다. 여기에 더해 5만 명 정도의 재소자가 형무소에 있었다는 사실, 11사단과 8사단으로 이어지는 영호남 토벌작전, 미군폭격의 희생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쟁 전 10만 명의 희생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에는 부역을 의심받은 주민들이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모두 학살당했다는 말이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국민보도연맹원 생존자가 부역혐의 희생자와 중복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중 생존자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고려한다면 이것만으로도 100만 명 희생자 주장이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정부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1953년이면 희생자명부와 가족명부가 작성되어 전국 경찰서에 배포되었음이 확인되는 문서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승만에게 반대세력 제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 한국전쟁기 이승만정권이 선포한 '비상조치령'이 무엇이고 그것을 왜 '위헌'이라고 판단하는지?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은 1950년 6월 25일 공포된 제1호 대통령령이었다. 주요 내용은 1심만으로 증거 설명을 생략한 상태로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악법이었다. 그런데 알려지지 않은 가장 심각한 측면은 1949년 2차 개악하려던 국가보안법의 내용이 바로 이 비상조치령의 것과 같았다는 점이다. 당시 정치적 부담 때문에 시행하지 못했는데 전쟁의 발발이 이 악법의 재사용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전쟁은 이승만에게 반대세력 제거를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법령은 50년 6월 28일자 공보에 실렸는데, 이 때문에 전쟁발발로 정신없던 이승만정권이 25일에 공포할 수 없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6월 25일 공포한 법령이 당일 공보에 실려야 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 아닐까 싶다.

비상조치령의 처벌대상은 수복 후 부역혐의를 받은 민간인들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 조금이라도 무장했다고 판단되면 군법회의가 적용되는 '국방경비법'에 의해 처벌 받았다. 국방경비법 역시 1심만으로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법이었다. 정부자료에 따르면, 비상조치령에 의해 처벌받은 민간인들은 2만 명이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국방경비법에 의한 피해까지 합치면 전체 피해규모는 대략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비상조치령이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은 내 주장이 아니고, 1952년 9월 9일 헌법위원회가 판단한 것이다. 이 결정문은 헌법재판소 도서관 자료집에서 볼 수 있다. 주요 내용은 대한민국 헌법은 비록 1심 재판일지라도 대법원의 판단을 받도록 하는 규정이다. 그런데 비상조치령은 이를 어기고 대법원 판단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어 위헌이라는 것이다." 

- 스페인 등 외국의 부역자 처리과정과 이승만정권의 '부역자' 처리과정을 비교하면 어떤 차이와 특징이 있는지?
"한국전쟁 부역자처리의 대상은 55만 명이었다. 인민군 점령기 불과 3개월 동안의 부역자들이었다. 2만~3만 명이 1심 재판을 받았고 최소 20만 명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나는 한국전쟁기간 중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한 3개월 동안 '부역'한 행위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죽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먼저 비슷한 사례가 있을까 고민했다.

먼저 내전을 치른 스페인을 조사했다. 1936년에서 1939년까지 3년 동안의 내전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공화파를 지지했다는 이유였고 당시 프랑코는 이들을 부역자로 간주했다. 이에 비하면 3개월 부역했다는 이유로 희생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치에서 해방된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나치에게 점령당한 기간은 1940년부터 1944년이었고 처리대상은 35만 명이었다. 처리결과는 학살이 9천 명, 재판이 1600명. 학살당한 9천 명은 수복 초기에 벌어진 경우로 유대인학살 등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경우와 크게 다르다. 수복하던 국군은 여성동맹위원장 등 '장'자만 붙어도 총살하고 북진했지만 이후 경찰이 복귀하기 전까지 무차별 보복은 크게 없었다. 본격적인 학살은 경찰서 사찰계 주임의 복귀와 함께 체계적으로 시작되는데 대략 50년 10월 6일경에 시작된다.

비교사례로 가장 끔찍한 경우가 우리의 친일파 청산과정이었다. 무려 35년간의 식민지 지배를 청산하면서 청산대상은 고작 7천 명에 그쳤다. 이들이 바로 1949년 설립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이었는데 이들 중 처형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비한다면 1950년 있었던 이승만정권의 부역자 처리는 그 자체가 동족 증오에 기초한 터무니없는 대량학살 전쟁범죄였고 자기부정에 해당하는 국가범죄였다."

- 이승만 정권이 한국 민간인들에게 저지른 국가범죄가 단순하게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는지 아니면 고의성이 있다고 보는지? 
"이승만정권에 의해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체계적으로 학살당했다. 전쟁 전 국가의 물리력을 동원하여 국민을 토벌하는 폭압에도 집권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전쟁이 발생했다. 이를 예상했다는 듯이 이승만정권은 비상조치령을 공포하였고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정치범들을 순차적으로 학살하면서 낙동강전선까지 후퇴했다. 한 달 뒤 인민군의 수를 압도한 미군이 북진을 시작하자 인민군 점령지의 민간인들을 '부역자'라며 그 자리에서 학살했으며, 치안이 확보된 후에는 체계적으로 주민들을 연행하여 고문 후 특정지역에서 집단 총살했다. 같은 시기 영호남지역에서는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국군 11사단이 피난민 등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잔혹행위를 저질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전쟁 발발 직후와 수복 직전 이승만정권이 민간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결정했던 문서와 증언들을 확보했다. 이 안에는 이승만정권의 고의적인 민간인처리 계획이 들어 있었다. 후퇴하는 동안 점령군에게 협력할 것으로 보이는 민간인들을 집단수용하라는 문서를 만들어 각 기관에 발송했으며, 수복하기 직전에는 처리할 부역자 명단을 작성하는 등 대책회의를 열었다. 전선을 오르내리면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학살 사건들은 이들이 세웠던 계획의 실행을 증명하는 것이다. 완전히 의도했다는 것 외에 다른 설명이 있을까?"

"대규모 민간인학살 계획 문서들 발견... 역사적 진실 규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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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3월 다시 수복작전을 벌이던 미군에 의해 발견된 학살 장소를 촬영한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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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 혹은 '전쟁범죄'와 관련하여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유족 입장에서는 명예회복일 것이고 내 입장에서는 역사적 진실규명이다.

당장의 구체적 과제는 여전히 말 못하는 유족들의 입을 터주는 것이다. 희생자들이나 유족들의 고통을 풀어주자는 데에는 여야당 정치인들이 반대하지 않던데, 정책으로 결정할 때는 전혀 달라지는 것 같다. 그동안 진실을 은폐하면서 덕을 본 사람들이나, 그냥 그렇게 복종하면서 겨우 안정되게 살았던 유족들에게는 불편한 과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말을 못하면 병이 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공포정치 이제 그만하고 말이나 좀 하게 해줬으면 한다. 전국의 각 지역사회도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희생자나 유족들에게 너그러웠으면 한다. 어디를 가나 어느 분야에서나 이분들을 소외시키는 게 보인다.

그리고 뜬금없는 말로 들리겠지만,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가해자 입장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저런 평범한 자도 악인이 될 것 같다'가 아니라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도 저런 악인이 될 수 있겠구나'하는 성찰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심각한 과제는 인권이 존중되고 평화로운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일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정통성 있는 정부를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대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관권 금권 부정선거에 다수의 시민들이 지게 되고 그 결과 부패하거나 독재성향의 지도자가 뽑히게 되면 결국 대부분의 시민들이 위험한 지경으로 몰려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을 적으로 여긴 이승만정권의 행태가 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민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국민을 존중하는 지도자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 저자 신기철은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에 다녔으며 인천과 구로, 영등포지역 노동운동과 고양 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했다.  지금은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에서 인권평화 연구소장으로 일하면서 지난 조사자료를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 나타난 유족들을 심층면담하고 있다. 저서로는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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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 국민들 적으로 보고 대량학살"

[인터뷰①] <전쟁범죄> 펴낸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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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범죄>의 저자 신기철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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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80년대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울대학교에 당당히 합격했다. 공부를 잘했고 마음도 착했으니 그냥 조용히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서 착실히 다녔으면 지금 그는 물질적으로는 무척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온하고 안락한 삶의 길을 걷지 않았다.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그가 찾아간 곳은 번듯한 대기업이 아니라 1980년대 당시 열악한 인천, 구로, 영등포지역의 공장들이었다. 여러 공장들을 전전하며 그는 노동운동에 몸을 던졌고 그 후 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내가 신기철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였다. 내가 기억하는 신기철의 첫 인상은 참 초라했다. 옷차림과 외모가 검소와 수수 그 자체, 아무것도 꾸미지 않는 순수와 소탈 그 자체였다. 그는 달변가도 아니고 성격이 원만한 편도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조금이라도 더 그를 알아갈수록 '초라한' 겉모습 뒤에 가려져있는 '위대한 정신'과 '뜨거운 정의감'을 지닌 신기철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지난 2010년 말 진실화해위원회가 이명박정권에 의해서 '폐업처리'되었다. 정부차원의 과거사정리가 막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길거리로 나온 40대 중반의 부인과 딸 셋을 둔 '무직' 가장 신기철의 과거사정리는 이제 시작된 것이다. 그는 학자가 아니라 조용한 행동가다. 진실화해위원회를 나온 뒤 그는 들판에서 벌써 3권의 책을 썼다.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에 이어 최근 이승만정권이 한국전쟁기 저지른 민간인학살 사건 <전쟁범죄>를 발간했다. 역사학 전공자인 기자가 그의 앞에서 숙연히 머리가 숙여지는 이유다.

다음은 지난 한 달간 신기철 선생과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승만정권의 학살행위는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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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범죄> 책 표지.
ⓒ 인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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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진실화해위원회 '폐업' 뒤 3번째 저서인 <전쟁범죄>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한국전쟁기 이승만정권이 자행한 자국민에 대한 여러 민간인학살을 '전쟁범죄'로 봐야한다는 시각이 있는데, 동의하나?
"한국전쟁 전후 벌어진 민간인학살은 군경에 의한 대량학살이었다. 서구학자들은 이를 메서커(massacre)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개별사건들에게는 적당해 보이지만 한국전쟁처럼 100만 명의 다양한 희생자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많이 부족한 개념 같다.

민간인에 대해 한국전쟁의 경우 전투에 방해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잠정적인 적으로 여겼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전쟁 전 빨치산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전쟁 후에는 점령군에게 협력할 것이라거나 협력했다는 이유로 국민보도연맹사건이나 부역혐의사건이 저질러졌다. 민간인조차 아군 편과 적군 편으로 가르면서 벌어진 집단살해행위라는 점에 주목한다.

한국전쟁 전후시기 이승만정권에 의한 민간인학살을 포괄적인 전쟁범죄로 보는 데 이견은 없어 보이지만 좁은 의미에서 '반인륜범죄'와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 논란이 있을 것 같다. 생명권의 측면에서는 사소한 차이일 수도 있겠다. 하여튼 좁은 의미에서 전쟁범죄는 점령지 민간인살해를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국민에게 저지른 고문이나 학살행위를 '반인륜범죄'라고 하며, 점령지 적국민에게 저지른 집단학살행위를 '전쟁범죄'로 본다는 해석이 있다.

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승만의 자국민 학살행위를 전쟁범죄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자국민을 독가스로 집단학살한 이라크 후세인은 '반인륜범죄'로서 사형 당했다. 독재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자국민을 학살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승만의 범죄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까? 대량학살이 벌어진 사실만으로도 '반인륜범죄'를 구성한다. 하지만 나는 전쟁 당시 이승만정권이 희생자들을 자국민이라기보다 적의 국민으로 보았던 것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로 보아 이승만정권의 학살행위에는 '전쟁범죄'라는 정의가 더 적절하다고 본다.

한 가지 비교해 보고 싶은 사례는 후퇴하는 인민군 측에 의한 민간인 학살행위, 곧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이다. 국군 수복 직후부터 조사되었던 이 사례는 KWC(Korean War Crimes, 한국전쟁범죄)라는 문서로 보고되었다. 점령군인 인민군이 저지른 민간인학살 행위였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대구10월항쟁이나 제주4․3사건, 여순14연대사건, 그리고 이에 이어 10만여 명을 학살했던 영호남지역의 토벌작전 피해 역시 전쟁범죄에서 봐야 사건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8․15해방 직후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은 스스로를 '해방자'가 아닌 '점령자'로 표현하였으며, 이를 계승한 이승만정권의 입장 역시 같았던 것은 아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이승만정권이 '국민과의 전쟁'을 시작하여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평가하는 이유와 근거는?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협상 결렬을 계기로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해방 후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일본식민지를 해방시켰다기보다는 점령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친일세력을 이용하면서 일반 국민들과는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대구 10월항쟁이나 호남지역의 추수봉기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집단학살사건을 저질렀지만 이를 일반적인 방식으로까지 발전시키지는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미군정을 승계한 이승만정권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직후부터 한국전쟁발발 직전까지 민간인학살 방식을 일반화시켰다. 예를 들어 제주 4․3사건을 생각해 보면, 토벌작전과 함께 민간인 3만 명이 희생되는 시기는 사건 직후인 1948년 4월이 아니라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였다. 여순사건과도 맞물려 있지만 이 시기는 이승만 단독정부의 수립 직후였다. 

영호남지역의 토벌작전 피해 역시 같은 시기에 시작되어 1950년 초까지 진행된다. 이는 잘 주목받지 않고 있는 측면이다. 같은 시기 민간인 인명피해는 10만 명이 넘으며, 여기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전국 각 지역 형무소에 수용되었거나 국민보도연맹원이 되었고 이들은 전쟁 발발 직후 모두 학살당하게 된다.

나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성공한 이승만정권이 남북화해정책보다 적대정책을 택했으며 자신의 반대자들을 모두 적을 돕는 세력, 또는 적으로 보았다는 데에 주목하고 있다. 결국 이승만정권은 반정부 세력 탄압의 관점이 아니라 적을 제거한다는 관점에서 증오심에 가득 차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본다.

그리고 '국민과의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물리력의 정비, 곧 국군의 정비다. 전방 4개 사단을 제외한 후방 4개 사단과 지역 경찰력이 후방 토벌을 빌미로 민간인학살에 동원되었고 결국 1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 대량학살을 초래했다. 이는 국민을 적대시한 정책의 결과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제노사이드(인종 학살) 연구자들은 집단학살 발생의 가장 큰 요인으로 물리력의 준비를 들고 있다. 학살 주체와 무기가 준비되어야 제노사이드가 일어난다는 것인데, 국민이 제어하지 못하는 군대가 준비된다는 것은 이미 국민에 대한 국가범죄가 시작됨을 의미한다고 본다."

"국군의 민간인학살이 인민군 학살행위로 왜곡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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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들은 1951년 3월 다시 수복작전을 벌이던 미군에 의해 발견된 학살 장소를 촬영한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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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진실화해위원회 이영조 상임위원(나중에 위원장)은 '미군전범조사보고서'의 왜곡을 지적한 저자(당시 조사관)에게 '악의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당시 미군보고서의 어떤 점이 왜곡된 것을 지적했나? 
"양평에서는 1950년 9월 28일 후퇴하던 인민군 측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학살이 있었다. 내가 직접 인터뷰한 양평경찰서 사찰계 형사는 당시 희생자 수가 150명 정도였다고 했고, 반면 수복 당시 현장을 목격한 미군 장교는 700명이라고 보고했다.

나는 양평지역 사건을 조사하면서 미군전범조사보고서(KWC#33) 내 사진자료를 보게 되었다. 여기에는 1950년 9월 말 후퇴하는 인민군 측이 학살했다는 증거로 쓰인 사진들이 있었다. 이중 2장의 사진을 보자. 

위 사진들은 1951년 3월 다시 수복작전을 벌이던 미군에 의해 발견된 학살 장소를 촬영한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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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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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여기서 일단 눈에 띄는 점은 사망한 지 4~5개월 되었다는 미 조사관의 법의학적 소견이었다. 1951년 3월 발견했으니까 4~5개월 전이면 1950년 10~11월이 된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이 사진은 1950년 9월 28일 국군 수복 후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을 촬영한 것으로 봐야 한다.

또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자 시신은 모두 수습되었다는 증언과 정황을 주목할 수 있다. 두 번째 사진의 백골화된 시신은 발견 당시까지 노골적으로 방치되었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시신이 방치되는 경우는 대부분 1950년 9월 28일 국군 수복 후 한국 민간인이 국군에 의해 부역혐의로 총살당한 경우이며, 인민군 측에 의한 희생자의 시신이 방치된 경우는 확인된 바가 없다.

희생지역도 문제가 되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지역과 국군 수복 후 부역혐의사건 피해지역이 1km 정도 차이가 나는데, 위 시신을 발견한 지역은 인민군 측에 의한 사건지역이 아니라 국군 측에 의한 부역혐의 피해지역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이 사진의 시신들은 인민군 측에 의한 희생자가 아니라 국군 수복 후인 1950년 10월 중순경 이후 희생자로 판단된 것이다. 결국 미군 측의 사진자료는 해당 사건과 상관없는 것으로 나는 진실위 근무당시 오히려 국군 수복 후 벌어진 부역혐의사건의 일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이영조 위원장 체제의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의혹 제기 수준에서 서술하라고 결정했다."

그러면 당시 미군보고서의 왜곡을 지적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저자)에게 왜 이영조 상임위원은 '악의적'이라고 지적했다고 생각하나?   
"진실화해위원회는 3개의 조사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사1국은 항일독립운동과 인민군 측에 의한 집단희생사건, 조사2국은 (한국)군경에 의한 집단희생사건, 조사3국은 인권침해사건을 조사했다. 당시 조사1국의 조사를 총괄 지휘했던 분이 이영조 상임위원이었다.

그런데 조사1국의 인민군 측에 의한 사건의 상당부분은 이미 사건 직후에 미군과 경찰이 조사한 사건이었으므로 당시 조사보고서인 KWC조사자료가 가장 결정적인 입증자료였다. 그러니 나의 지적이 이영조 상임위원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KWC 조사자료의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린 것으로 여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여간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한다면 한 자료에서도 많은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국방부에서 조사한 증언록 역시 진실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보고 있다. 자료를 올바로 해석하자는 게 과연 '악의적'인지 여부는 독자들이 판단하리라 믿는다."

"김구 선생 지지했던 군인들, 이승만정권 아래서 전부 학살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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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형무소에서 이승만정권에 희생당한 해군 창설 멤버 전호극 소령.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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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기 형무소에 이미 갇혀있던 주요 반정부인사의 학살사례를 소개하면?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를 토대로 19개 형무소 희생자 수를 추정해 보면 적어도 2만 명을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두 전쟁 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거나 재판과정에 있던 분들이다. 학살된 분들 중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했던 분들도 많아서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아마 근현대사를 다시 정리해야 하는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집단학살사건에 있어서 반정부인사의 죽음을 따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어 보이지만 그 동안 알려져 있던 것에서 벗어나 있는 사례들이 있다. 형무소에서 희생되신 분들을 구분지어 본다면 제주4·3토벌작전에서 연행되신 분들과 여순토벌작전에서 연행되신 분들이 가장 큰 규모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인 숙청 군인들도 한 그룹이 될 수 있다.

마산형무소에서 희생당한 해군 창설 멤버 전호극 소령(1913년생)을 예로 들어보자. 전쟁 전 숙청당한 군인들 수는 장교 242명을 포함하여 4400여 명이 된다. 김구 계열인 전 소령은 1949년 2월 여순사건과 관련 있다며 연행되는데, 같은 해 6월 김구 선생의 암살 후 징역 6년형을 선고받는다. 전 소령은 같은 해 5월 6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이등병으로 강등된 후 강제 퇴역당해 민간인 신분으로 마산형무소에서 수용생활을 했다. 그런데 마산형무소에는 같은 이유로 수용당한 군인들이 4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숙청당한 군인들은 1950년 7월 초 마산과 거제 사이 괭이바다라는 곳에서 동료 해군 헌병대들에 의해 학살당한다. 결국 김구 선생을 지지했던 군인들이 이승만정권 아래서 전부 학살당한 것이다. 

전쟁 직전 국군의 수가 9만 8천 명이었으니 숙청당한 군의 규모가 무척 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승화 장군 등의 수기를 보면 당시 용감하고 실력 있는 군인들이 숙청당해 안타까워하는 내용을 종종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이 한국전쟁 초기 왜 국군이 그렇게 일찍 붕괴되었는지 설명해 주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그 대표적 사례가 전호극 소령이라고 생각한다."

- 인민군 후퇴시기 민간인학살과 관련하여 진실이 왜곡된 사례가 있었는가?
"경찰의 공격으로 희생당한 영광 오길종 일가족 3명이 좌익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된 경우는 진실이 완전히 왜곡된 사례라고 하겠지만 이렇게 명확히 확인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내가 진실위에서 조사한 민간인학살사건 대부분의 경우는 기본적인 진실조차 규명되지 않았다. 여러 제약으로 정부 측 기록에서 확인되는 의문점을 지적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것이 인민군 후퇴시기의 학살명령이다. 인민군 측에 의한 학살 중 84.6%가 1950년 9월 26~30일 사이에 벌어졌으니 조직적인 명령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조차도 당시 순차적으로 수복되는 전황을 보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수복 후나 같은 시기에 발생하는 사건들이 많다.

하여튼 약간 차이가 있지만 국방부나 진보 학자집단 모두 인민군의 학살명령이 있었다는데 견해가 일치된다. 하지만 나는 양쪽 다 주장의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특히 국방부나 검찰은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책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그 근거로 체포된 군산(당시 옥구군) 미면 신관리 인민위원장의 자백을 들고 있다. 문서 한 장 남은 것이 없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그 시기 전국의 희생사건을 일개 리 인민위원장의 자백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게다가 군산에서 사건이 발생하던 1950년 9월 28일 서울 영등포에서 체포된 이 인민위원장은 재판 출석자 명단에서는 다른 10여 명과 함께 사라진다. 나는 이미 부역혐의로 학살당한 뒤였기 때문에 생긴 현상으로 추정한다. 갖은 고문이 횡행하던 시대였고 재판도 받기 전에 처형이 이루어진 시대의 자백, 그 조차 입증자료도 없고. 이걸 믿는 것이 과연 상식적일까?" 

☞ 인터뷰 2편으로 이어집니다.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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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메리 (Jean Amery / 1912~1978)


프리모 레비, 엘리 위젤과 함께..

아우슈비츠 생존 3대 작가로 손꼽히는 그는


<자유죽음>(1976)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인 특권으로서의 '자살'을 얘기했다


실제로 그는 1978년 66세의 나이에

작품 낭독회를 앞두고 '자유죽음'을 실천했다


그가 남긴 말


"나는 밖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그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구원이다"



그의 묘비에는 아우슈비츠 수감번호 '172364'가 새겨져 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 분의 '사상과 삶'을 그림과 영상으로 표현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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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해져 해마다 옛 망월동서 걸개그림전 열고파”


화가 이상호씨. 사진 최성욱 다큐감독
화가 이상호씨. 사진 최성욱 다큐감독
병마 속 첫 개인전 민중미술가 이상호씨

두 평 반 크기의 방에 놓인 목판이 눈에 띄었다. 지난 3일 아침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 선덕사 3층 작업실에서 만난 화가 이상호(55)씨에게 목판화 이야기부터 물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완성한 <죽창가>(72×54㎝)라는 작품이다. 낫을 들고 죽창을 만드는 민초의 눈에 시대의 분노가 녹아 있다. “밤낮없이 시위 현장에서 싸우고 시간이 날 때마다 작업실로 가 나무에 새겼지요.” 이씨는 10~16일 광주시 동구 디에스갤러리에서 ‘역사의 길목에 서서’라는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연다.


<그만 좀 쫓아와라!>(1987) 등 판화와 걸개그림뿐 아니라 <동학농민군의 식사>(1994), <통일염원도>(2014) 같은 회화 등 모두 4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노모(83)는 늘 “싸우는 그림을 그리더라도 인정있게 그려라, 잉~” 하고 조언한다.


이씨는 6월 항쟁 때 처음으로 경찰에 잡혀갔다. 조선대 미대에 재학 중이던 이씨는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가 대공과에서 정신없이 두들겨 맞았다. 그러다가 한 형사가 하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라는 것을 들먹이던 형사가 ‘니 아버지는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뽑고, 너는 (전두환을) 물러가라고 해야?’라며 빈정댔다. 이씨는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아침에 일어나 (경찰서) 이 방 저 방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고 해요. 경찰에서 (겁이 났는지) 훈방해 아파트에 밀어넣고 갔어요.”


10~16일 광주서 ‘역사의 길목에…’
판화·걸개그림·회화 40여점 선봬
6월항쟁 뒤 성조기 찢는 그림 그려
남영동서 고문겪고 보안법 위반 구속
후유증에 매년 정신병원 오가


87년 8월 두번째로 경찰에 끌려갔다. 전정호와 공동제작한 걸개그림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라는 작품 때문이다. 노동자와 농민이 미국의 성조기를 찢는 장면이 빌미가 됐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폭행과 고문에 시달렸다. 이씨는 “형사 한 놈이 욕조가 있는 조사실로 데려가 팬티만 입게 한 채 세워놓고 ‘박종철이 죽은 곳이다’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다음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그는 요즘 고려 불화에 관심이 많다. 93년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고려불화전을 본 뒤 마음을 뺏겼다.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하는 화승의 정성이 깊게 스민 작품”에 매료돼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러다가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예능보유자였던 만봉 스님을 찾아가 6개월 남짓 밑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다.


그는 꿈속에서 교도소 배식구에 손을 넣고는 군복 입은 박정희에게 “손목을 자르라”고 소리치는 악몽에 시달리곤 한다. 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시민군이 되어 쫓기다 잠을 깨기도 한다. 더 무서운 고통은 “병원에 들어가는 꿈”이다. 그는 젊은 시절 겪은 고문 등의 후유증 탓에 요즘도 1년에 한 차례 정신병원에 입원해 2~3개월 정도 지낸다. 전시작 <첫눈 오는 날>(2005)을 보노라면, 정신병원에서 창문 철창을 잡은 채 무릎을 꿇고 있는 환자의 뒷모습이 진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그곳에 있을 때 퇴원하는 환우들을 위해 초상을 스케치해 선물해요. ‘다시는 아프지 말고 다시는 여기서 보지 말자’며 초상화를 건네줘요….”


그는 “건강해져서 해마다 5월에 80년 5월 희생자들이 처음 묻혔던 옛 망월동에서 걸개그림전을 지속적으로 여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박구용 전남대 교수(철학·미학)는 “80년대를 떠나지 않고 그때 동지들과 함께했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는 ‘날개 잃은 이 시대의 천사’”라고 도록 서문에 적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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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 <홀로코스트의 아이들>


나중에 좀더 꼼꼼히 보려고 이렇게 촬영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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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항쟁

2015.06.10 22:17










































대학 3학년 때 만난


87년 6.10 민주항쟁.. 가슴 벅차게 뜨거웠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고 문익환 목사님의 절규


아~ 박종철 열사여!.. 아~ 이한열 열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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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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