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 제1회 ⑤ 투견




박태길씨가 어릴 때 살던 부산 영도구 영선동 미니아파트 창밖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1978년 건축된 미니아파트는 부산의 가장 오래된 아파트 가운데 한 곳이다. 부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때려.”

여자 아동 소대에 신입 아이가 한명 들어왔다. 은영이 몇 달 전 들어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울며 내보내 달라고 떼를 쓴다. 아직 형제복지원이 어떤 곳인지 감을 잡지 못한 것 같다. 작고 힘없는 은영에게 조장 엄기자가 명령한다. “저 애 때리라고.”

은영은 주춤거리며 주먹을 들지 못했다. 복지원에 들어오기 전 동네 아이들과 싸움을 하기는 했지만 이유 없이 사람을 때린 적은 없다. 저 아이를 왜 괴롭혀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개새끼.” 덩치 큰 조장 엄기자가 은영에게 성큼 다가와 손으로 머리를 후려쳤다. “때리라고. 이년아.” 머리에 불꽃이 일며 머리가 후끈거린다.

열살 은영은 맞아 부은 얼굴로 울부짖는 아이에게 다가가 뺨을 때렸다. 맞지 않기 위해선 때려야 한다. 아이가 더 큰 소리로 울부짖는다. 국방색 모포 속 아이는 처음 복지원에 와서 내보내 달라던 은영의 과거였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사람을 때리는 일이 다음부터는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신입 소대원이 들어와 서럽게 울고 발버둥 칠 때마다 다른 여자아이들과 함께 국방색 모포를 뒤집어씌우고 주먹과 발로 때렸다. 처음 들어왔다고 우는 아이들은 가엾지 않고 시끄럽게만 보였다. 동정이나 자비, 공감, 이해, 용서 같은 감정들은 복지원에서 순식간에 기화되었다. 조그만 자극에도 분노와 증오가 타올랐다.

열살 은영은 맞아 부은 얼굴로 
울부짖는 아이의 뺨을 때렸다 
맞지 않기 위해선 때려야 한다 
아이가 더 크게 울부짖는다 
그 아이는 은영의 과거였다

성주이던 박인근이 잡혀갔다 
1987년의 대한민국은 뜨거웠다 
민주화의 깃대조차 되지 못했던 
복지원의 감금자들은 잊혀졌다 
태길도 겨울에 복지원을 나왔다

우리들은 모두 홀로였다. 어둡고 깊은 계곡 사이를 쫄쫄거리며 흘러가다 손바닥만한 흙바닥으로 모이면 스며들고 마는 한 줌 물이었다. 우리는 댐이나 저수지로 모여들지 않았기에 위험하지 않은 존재였다. 우리들은 타인과 비밀을 공유하기 어려웠다.

“외부인한테 쓸데없는 말 하면 죽는다.” 우리는 서로를 감시하도록 강요받았다. 외부 손님이 다녀갈 때나 복지원 내 야간중학교나 개금 분교에 다니는 아이들한테는 늘 그런 지시가 있었다.

여자 아동 소대의 한 아이는 분교 선생님에게 집에 보내는 편지를 전달했다가 소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편지를 전하는 장면이 또 다른 학생의 눈에 포착되었고 금세 소대장에게 보고되었다. 은영이 속한 소대는 밤새 기합을 받았다. 편지를 주는 걸 본 또 다른 아이가 있느냐,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협박과 위협이 반복됐다. 소대장에게 고자질을 한 아이만은 체벌을 받지 않고 편하게 앉아 있다. 은영은 고자질을 한 아이만큼 부모에게 편지를 전달하려 한 아이도 미웠다. ‘조용히 살 것이지.’

우리들은 수용자 번호나 별명으로 불리어졌다. 제대로 된 이름은 갖지 못했다. 도망을 치거나 죽으면 명단에 줄이 그어졌다. 복지원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탈출자가 있는지 인원을 점검했다. 매년 복지원 인원은 증가했다. 1975년 12월 516명이던 수용자는 816명, 1111명, 1325명, 1293명, 1221명, 1713명, 1985명, 2525명, 2861명, 3011명으로 매년 증가했다. 86년 말에는 수용자가 3128명이었다. 형제복지원에서는 12년간 513명이 숨졌다. 사실 누구도 검증하지 못한 장부상의 숫자다.

형제복지원 꼭대기에는 작은 무덤들이 듬성듬성 있었다. 누군가는 이 무덤 속에 수용자들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죽어서도 가족들이 찾지 못할 것이며 이 공간에서 벌어진 감금과 학대를 알릴 수 없다. 나간다고 해도 부랑자로 낙인찍은 시선들이 우리들이 당한 일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철창 밖 사람들이 탄생과 동시에 매우 느린 속도로 사망에 다가서는 그 시간에 우리는 매 순간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외부 병원으로 나가는 절차는 까다로웠다. 운동장에서 숨이 넘어가려는 한 할머니는 들것에 실려 있었다. 복지원 관리자들은 외부 출입을 시키느니 마느니 옥신각신했다. 할머니는 결국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운동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회 병원으로 보냈다가 도망을 치는 사례가 생기자 외부 병원으로 가는 조건은 점차 까다로워졌다. 의사가 있다고는 하는데 그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간호사 자격증도 없는 복지원의 아이들이 어깨너머 배운 기술로 찢겨진 부위를 찢고 실로 깁고 소독했다.

정신과 병동은 비밀스러웠다. 가짜 외과 의사나 간호사 노릇을 하며 병동을 관리하던 수용자들도 정신과 병동에는 들어갈 수 없다. 누가 사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복지원 내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계단으로 올라갈 때면 창문 너머로 정신과 병동 내부가 보였다. 한 여자가 그곳에 있다. 벌거벗은 젊은 여자가 침대에 묶여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고함을 친다. 누구도 듣지 않았다. 어제도 오늘도 그 여자는 늘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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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 제1회 ④ 은영의 사탕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mayseoul@naver.com

유혹의 순간이 다가왔다. 태길이 아동 소대 조장이 되기 전, 그러니까 탈출에 실패하고 원장에게 실컷 두드려 맞은 뒤 근신 소대에 배치돼 온종일 돌을 깨는 고역을 하던 때였다.

“오늘 밤 한번 대주면 근신 소대에서 나가게 해 줄게. 화장실로 따라온나.”

태길처럼 부산 영도가 고향이라던 6소대(근신 소대) 조장이 그에게 슬며시 제안을 해왔다. 태길은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평소 같으면 무시했을 그 덫이 밀물처럼 다가와 빠져나가지 않았다. 매일 반복되는 돌 깨는 작업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돌을 깨는 손은 감각을 잃을 만큼 얼얼해졌고 조금이라도 꾀를 부리면 관리자들로부터 얻어터졌다. 화장실에 갈 때만 손에 쥔 망치를 놓았다. 엉덩이를 대준다면, 잠깐 내가 아닌 내가 된다면 이 지옥에서 자유롭게 될 것 같았다.

소대의 불이 꺼지고 모두들 자리에 누웠다. 철제 침대에 누운 태길도 눈을 감았다. 화장실로 따라오라던 조장의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되풀이된다. 두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팬티를 벗어 편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전날 잠이 든 모양이다. 태길은 조장 표정을 살폈다. 별다른 변화가 없다. 소대장은 오늘 중대 발표를 한다고 했다. “84-4218번, 아동 소대로 이동!” 84-4218번은 태길의 수용 번호다. 알고 보니 태길이 오늘 근신 소대에서 아동 소대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조장이 미리 알고 유혹한 것이다. 어젯밤 엉덩이를 까든 안 까든 이 무시무시한 근신 소대에서 떠날 수 있었다.

소대장 충식은 아이들을 때리다가도 살갗을 쓰다듬는다. 소대장 충식이 남자 아동을 담당하기 전에는 여자 아동 소대를 관리했다. 충식은 열살짜리부터 가슴이 나오기 시작하는 열 몇 살짜리까지 여자아이들을 불러 침대에 앉혔다. 아이의 추리닝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여기저기를 만졌다. 어린 나이에 복지원에 납치된 아이들은 성교육을 받지 못했다. 충식이 무엇을 하는지, 왜 옷에 손을 넣는지 아이들은 알지 못했다.

폭행이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지 않듯 성추행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60여명이 함께 쓰는 여자아이들의 소대에서 충식이 아이의 옷에 손을 넣을 때마다 다른 수십개의 눈동자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 날 아침에 보면 충식의 침대에서 여자아이와 충식이 함께 누워 있었다. 충식은 아이의 살을 만지다가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가.” 아이는 시키는 대로 충식의 침대에서 자기 자리로 이동했다. 소대장들은 자신들의 구역에서 작은 박인근이었다.

은영은 열살이던 1982년 부산 사하구 괴정동에서 내복 차림으로 엄마 심부름을 하러 길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는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검은 차가 다가와 집에 데려다 준다고 하기에 싫다고 했더니 억지로 태웠다. 복지원에 처음 들어온 날 어른 한명이 다가와 몽둥이를 들고 엉덩이와 어깨를 내리쳤다. 여자 아동 소대로 옮겨져 몇날 며칠을 울자 아이들이 시끄럽다며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고 뺨을 때렸다. 국방색 모포를 뒤집어씌우고는 발길질을 해댔다. 나중에는 때리면 때리나 보다 그렇게 되었다.

하루는 은영이 사택 앞 흙바닥에 앉아 쉬고 있었다. 복지원의 새마음교회 주일학교 교사 박봉석이 다가와 은영의 옆에 앉았다. “너 참 예쁘게 생겼구나.” 교사 박봉석은 은영의 볼에 입을 맞추고선 옷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직 나오지도 않은 가슴을 더듬더니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만지기를 반복했다. 박봉석은 손을 빼더니 눈깔사탕 하나를 은영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거 먹어.” 은영은 눈깔사탕을 손에 쥐었다.

폭력은 여자아이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충식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소대장들은 매번 바뀌었는데 어떤 소대장은 여자아이들을 어른 군인처럼 대했다. 심하게 맞아 다쳐서야 때리지 않았다. 소대장이 아이들을 때리고 “일어서”라고 명령했을 때에도 움직이지 못하면 가만히 놔뒀다. 그조차 상황에 따라 매일 달라졌다. 소대장은 바닥에 엎드려 기진맥진한 여자아이를 발로 툭툭 쳤다.

“이 새끼가 꾀병을 부리네.”

소대장은 아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손바닥으로 세차게 뺨을 후려쳤다.

“너 아파, 안 아파?”

“안 아픕니다. 괜찮습니다.”

“안 아프지?”

“네.”

“똑바로 서. 새꺄.”

악마의 발길질은 또다시 시작됐다. 소대장들은 모두 복지원의 수용자 출신이었다. 일부는 여자, 남자 짝을 이뤄 복지원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렸다. 원장 박인근의 눈에 든 일부 소대장은 원장의 사택에서 살 수 있는 영광이 주어졌다.

어떤 언니들의 배는 달처럼 둥글게 부풀었다가 가늘어졌다. 둥근 배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은영은 듣지 못했다. 배가 볼록 나온 언니가 소대장 발에 걷어차여 바지 밑에서 피가 나오는 걸 보았다. 여자 아동 소대에서 가장 바보 같았던 영숙 언니의 배는 몇 번이나 부풀어 올랐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고 했다.

조장 엄기자와 엄기자의 ‘꼬붕’인 서지예는 늘 붙어 다녔다. 덩치가 크고 무서운 얼굴의 조장 엄기자도 소대장 앞에서는 순한 양이었다. 시키는 것은 모두 수행하였다.

“어서 벌려 봐.”

엄기자와 서지예는 영숙 언니에게 팬티를 벗고 성기를 보이라고 명령했다. 엄기자가 소대장에게 그러하듯, 영숙 언니는 사람들이 시키는 것을 무엇이든 했다. 엄기자와 서지예는 막대기로 영숙의 성기를 툭툭 치며 키득댔다. “이게 걸레지, 사람 거냐?” 영숙의 성기는 쭈그러진 할머니 것처럼 축 벌어져 있다.

영숙 언니가 정신을 놓는 날이 많아졌다. 아무 데서나 훌훌 옷을 벗어던지며 괴성을 질렀다. 여자아이들은 옷을 벗는 영숙 언니에게 발길질을 했다. 영숙은 아이들 한가운데서 피를 흘리면서도 자꾸 옷을 벗는다. 살결에 붉은 피가 돋아난 영숙 언니가 꽃처럼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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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 제1회 ③ 프로야구와 장례식




박태길씨가 부산 중구 광복동 용두산공원을 걷고 있다. 박씨는 용두산공원과 인연이 깊다. 1984년 형제복지원 직원한테 끌려간 곳이 용두산공원이었고, 복지원을 탈출한 뒤 몇년이 지나 자신을 때리던 소대장들을 우연히 다시 만난 곳도 용두산공원이다. 부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불행은 지극히 평범한 날에 예고 없이 찾아온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살던 집이 사라지며 믿었던 관계들이 파괴된다. 불행이 뿌리째 뽑아버린 인생들은 토양을 잃고 차가운 아스팔트 도로나 도시의 아무 곳에 내던져진다. 헐벗은 것들이 다시 뿌리를 내려 보지만 쓰레기나 아스팔트를 뚫으려 할수록 상처가 생긴다. 피투성이라도 살아보라고 말하는 신에게 돌을 던지고 싶은 날이 있다.

태길의 불행은 1983년 프로야구 시즌에 찾아왔다. 그가 복지원에 납치되기 1년 전, 부산은 프로야구로 물들었다. 가게마다 프로야구 중계가 나왔다. 식당 구석 텔레비전에서 야구 중계가 나오면 모르는 사람들도 롯데를 응원하며 한 팀을 이루던 시절이었다. 5월의 어느 토요일, 롯데와 해태가 경기를 치르는 날 태길과 친구들은 국민학교 6학년 수업을 마치고 길을 걸으며 경기 결과를 예측했다.

“롯데하고 해태하고 붙으면 누가 이기겠노?”

“롯데가 이기지. 인마, 말이라고 하나? 내기할까?”

그날 롯데와 해태가 프로야구 경기를 벌이지 않았다면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을 아주 평범한 토요일이었다. 가방을 멘 태길과 친구들 곁으로 흰색 병원 응급차가 급하게 달렸다.

“저 차 봐라. 사람 죽은 거 아니가?”

“그런갑다, 야.”

태길이 친구들과 헤어져 아파트 앞에 다다랐을 때 식육점 가게 아주머니가 태길을 급하게 불러 세웠다. “느그 어머니 병원에서 오셨다. 빨리 들어가 봐라.”

방금 전 태길을 지나쳐 가던 흰 차, 누가 죽는가 보다 말했던 차는 영도구 영선동 ‘미니아파트’로 도착해 엄마를 내려주고 떠난 뒤였다. 태길은 아파트 301호로 뛰어올라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버지와 이모들이 있다. 눈을 감은 엄마는 힘없이 바닥에 누워 있다.

“엄마, 엄마.”

아무리 불러도 엄마는 눈을 뜨지 않았다. 얼굴을 만져도 미동이 없다. 엄마는 초조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1년 만에 집을 찾아와 아들에게 말 한마디를 뱉지 않았다. 엄마는 1년 전부터 백혈병을 앓았다. 부산 중구의 메리놀병원이라는 곳에 1년간 입원했지만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태길은 일주일에 한번씩 두 시간을 걸어 메리놀병원에 갔다. 손에는 버스비가 없었다. 함부로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기에 병실 창문에서 엄마 얼굴만 물끄러미 쳐다보다 발길을 돌렸다. 창문에 얼굴을 대어서라도 엄마를 느끼고 싶었다.

오늘은 병원 창문에서 보던 엄마가 영원히 먼 곳으로 갈 것 같다. 태길은 밤이 되도록 엄마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엄마 냄새를 맡아보고 팔을 잡아보고 얼굴을 매만지다 잠이 들었다.

“언니! 언니! 아이고, 언니!”

잠결에 통곡하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니 가족들이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울부짖는다. 태길이 잠든 시간에 엄마는 말 한마디 없이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엄마의 장례는 다음날 아파트 옥상에서 치러졌다.

어머니가 없는 집은 적막했다. 10개월쯤 지났을까. 버스 기사였던 아버지가 아가씨를 하나 데려왔다. 천일관광 고속버스 안내원이라고 했다. 태길이 어머니를 아직 떠나보내지 못할 때였다. 새어머니는 태길의 마음을 얻어 보려고 학교 앞에 빵을 들고 찾아오기도 했다. 태길은 이유 없이 새어머니가 미웠다. 그렇게 일찍 다른 여자를 집에 들인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듬해인 1984년,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이었다. 우산을 쓰고 나가도 금세 옷이 다 젖어버릴 만큼 장대비가 내리던 날에 새어머니가 큰 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태길은 문 앞에 선 새어머니와 마주쳤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새어머니가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그날 이후 새어머니는 다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모와 친할머니가 숨진 어머니의 패물이 사라졌다며 새어머니를 의심할 때였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패물은 새어머니가 사라진 뒤 집 안 어딘가에서 뒤늦게 나왔다.

어머니와 새어머니를 잃은 뒤 태길의 가출이 시작됐다. 중학교 1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학교에 갈 일 없는 태길은 1984년 여름 어느 날, 집을 나와 남포동 용두산공원 등나무 아래에 누웠다. 머리 위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날도 따스하고 바람도 적당했다. 잠이 쏟아졌다. 몇 시간쯤 지났을까. 누군가 태길의 허리끈을 달랑 들었다. 열네살 소년이 버둥거려도 소용없었다. 태길은 짐짝처럼 가리개로 덮인 트럭에 실렸다. 트럭에 ‘형제 복지원’이란 글씨만 없었더라도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종종 집을 나갔다 들어오던 동네 친구들은 형제복지원이 사람을 감금한다고 말해주었다. 어른들은 믿지 않았지만.

트럭에는 사람이 스무명쯤 타고 있었다. 그날 밤 가리개로 덮인 복지원 트럭은 길을 달리다 중간중간 섰고 그때마다 사람들이 올라탔다.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요?”

트럭에 탄 아저씨 한명이 소리치며 반항했다. 복지원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 둘이 아저씨를 개 패듯이 지근지근 짓밟고 때렸다. 아저씨는 피를 흘리며 복지원 직원의 발밑에서 신음 소리를 냈다. 이윽고 종잇장처럼 구겨진 아저씨가 트럭 구석에 머리를 숙인 채 처박혔다.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탄 사람들은 아저씨의 패배를 보며 공포심에 몸을 떨었다. 개처럼 맞기 싫으면 겁에 질린 얼굴로 꼬리를 내려야 했다.

새벽 세시쯤 지났을까. 트럭은 한곳에 정차했고 태길은 사람들을 따라 내렸다. 쇠막대를 들고 똑같은 옷을 입은 복지원의 직원들이 돌아다닌다.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문이 찌그덩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혔다. 차에서 내려 신입 소대라는 건물에 끌려갔다. 복지원 직원들은 팬티 한 장 남기지 않고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태길도 사람들을 따라 옷을 벗었다. 나체의 남자들이 지시에 따라 신입 소대에 두 줄로 정렬하자 직원이 나와 몸을 수색했다. 신체검사가 끝나자 파란색 추리닝을 배급해 준다. 옷을 갈아입자 취침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태길은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의 곁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이곳에 왜 끌려왔을까, 빠져나갈 수는 있을까, 살 수는 있을까…. 닥쳐온 불행이 이해되지 않았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지만 이불 속에서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1984년 어느 여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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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 2014.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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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mayseoul@naver.com

생명은 질기다. 지옥 끝으로 떨어져도 악마들에게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때리고 맞는 장면을 매일 보다 보면 어느덧 견디게 되고 무뎌졌다. 시간은 사람을 익숙하게 만들었다. 식당에서 수용자들이 맞는 걸 보아도 배가 고팠고 배가 고프면 숟가락을 들고 식판에서 밥을 떠먹었다. 복지원에서 사람이 두들겨 맞는 일은 은밀하지 않다. 복지원의 세세한 규칙은 헌법보다 존엄했고 이를 어길 때에는 학대와 폭력이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원장 박인근이나 그의 하수인들은 원생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수용자를 때릴 권한을 태어날 때부터 가진 사람처럼 굴었다.

이곳 형제복지원은 거대한 성이다. 부산시 북구 주례동 산18-1번지, 6820평의 복지원에는 각종 시설들이 질서 있게 배치돼 있다. 교회, 내무반, 직원 사택, 선도실, 회의실, 작업보도공장, 식당, 창고, 취사장, 세탁소, 이발소, 개금국민학교 분교, 야간중학교, 목욕동, 사무실, A·B·C병동, 지하 냉동실 1~4호실이다. 수용자들이 등에 돌을 지고 꼭대기를 오르내리며 만든 건물이다. 원장 박인근의 경비원들은 24시간 복지원의 철문을 지키며 누구도 허락 없이 들어가거나 나가지 못하게 했다.

복지원의 생활은 매일이 반복적이다. 새벽 5시 기상, 5시30분 예배, 6시 점호, 6시30분 구보, 7시 아침 식사, 8시 노동…. 원생들은 그곳의 질서에 순응케 하는 각종 기합을 받았다. 한강철교, 히로시마 타기, 원산폭격, 통닭구이, 김밥말이. 한강철교는 두 팔을 바닥에 짚고 엎드려뻗쳐서 뒷사람의 어깨에 다리를 올리는 기합이다. 두번째 사람이 세번째 사람에게, 세번째 사람이 네번째 사람에게, 네번째 사람이 다섯번째 사람에게. 원생들이 똑같은 자세를 취하면 소대에는 사람 다리로 연결된 긴 철교가 형성됐다. 한 사람이라도 철교를 무너뜨리면 기합의 강도는 더 세졌다. 히로시마 타기는 물구나무를 서서 발을 2층침대에 올리는 일이다. 기합을 받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머리에 피가 쏠리고 위 안의 음식물이 쏠려 구토가 나올 것 같은 증세가 나타났다. 김밥말이는 원생들이 나란히 누워서 돌돌 구르면서 김밥을 마는 것인데 김밥의 상단을 차지하는 원생들이 오래 있으면 밑에 깔린 사람은 숨이 막혔다. 한강철교, 통닭구이, 원산폭격, 조장들은 가만히 앉아 이 자세에서 저 자세로, 저 자세에서 이 자세로 바꿔가며 벌을 줬다.

쥐나 지네를 잡아먹던 원생들은 
배고픔 앞에서 비굴해졌다 
원장 아들은 가끔 사택 창밖으로 
라면 수프나 십원짜리를 던졌다 
태길도 두 발을 들어 뛰어올랐다

어떤 언니들의 배는 달처럼 
둥글게 부풀었다 가늘어졌다 
영숙 언니는 몇 번이나 그랬다 
아무 데서나 훌훌 옷을 벗으며 
괴성을 지르는 일이 잦아졌다

기합의 이유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토요일 오전마다 원장 박인근이 각 소대를 돌며 위생 상태 등을 점검하는 내무 사열을 하는데 그때 금주의 실천사항을 외우지 못했다거나 위생 상태를 지적받으면 그날로 끝장이었다. 소대장들은 원장 박인근에게 벌벌 기었다. 그들 또한 원장 박인근으로부터 체벌을 받았다. 이불을 제대로 개지 않았다거나 행동이 굼뜨거나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도 소대장이나 조장들은 원생들을 구타했다.

복지원에 갇혀 받아먹는 것들은 매일 같았다. 전어젓과 양념된장은 늘 식판에 올랐다. 말이 전어였지 썩은 전어를 가져와서 삭힌 희멀건 액체였다. 양념된장에서 된장 맛은 나지 않았다. 딱히 어떤 맛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박 원장은 수용자들의 식사가 1식 3찬이나 된다며 외부 세계에 자랑했지만 3찬 가운데 2찬은 양념된장, 전어젓이었다. 선짓국도 신물나게 나왔다. 선지를 넣었다는 물에선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원장 사택 근처에 있는 밭에서 쬐그만 월남고추가 자랐다. 가끔 태길이 그 고추를 손에 쥐게 되는 날이면 밥 한그릇을 꿀처럼 먹었다. 된장이라고 할 수 없는 양념된장이나 전어젓에 비해 월남고추는 복지원에서 먹을 수 있는 가장 신선한 음식이었다. 그나마 먹을 만한 게 콩국과 빵이었다. 빵을 받는 시간에 원생들은 긴 줄을 섰다. 빵 한 개를 손에 더 넣으려다 들키면 혼쭐이 났다. 소대장들은 빵을 더 가져가도 괜찮았다.

몇몇 수용자는 쥐나 지네를 잡아먹었다. 달고 단 고기 맛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라도 굶주림을 덜어보려고 했다. 산에 지어진 복지원 꼭대기에는 교회와 원장 박인근의 사택이 붙어 있었다. 가끔 사택에선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사택에서 풍겨 나오는 고기 굽는 냄새를 맡으며 복지원 꼭대기에서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면 손에 닿을 것 같았다. 저 아래 슈퍼마켓과 목욕탕 굴뚝, 주택과 지나다니는 자동차들…. 한발 내디디면 닿을 것 같은데 소리치면 들을 것 같은데 철창 밖 세상은 우리가 이유도 없이 이곳에 감금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세상은 우리들이 감금된 것이 아니라 보호받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외부 손님들은 우리를 자유롭게 접촉하지 못했다. 복지원 직원들은 손님들을 데리고 다니며 다양한 건물들을 보여주었고, 손님들은 그 무한한 질서에 감탄을 금치 않았다. 외부 손님들이 올 때면 보이지 않는 공간에 우리들을 보내기도 했고, 늘 입는 추리닝이 아닌 사복을 입혀 전시하기도 했다. 어린이날이나 명절 같은 특별한 날에 손님들이 가고 나면 귤, 사탕, 초코파이가 담긴 비닐봉지를 한 개씩 받았다. 그 봉지에 든 음식을 아껴 먹으려고 침대 같은 곳에 숨겨두었다가 없어지기도 했다. 그럴 때는 원생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손님들이 올 때만 잠깐 입혔다 뺏어가는 옷들은 복지원 내부 봉제공장에서 원생들이 만든 것이었다. 원장은 복지원 내부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바깥세상에 내다 팔았는데 우리는 얼마에 팔리는지 알지 못했다. 태길도 국민학교 운동회장에서 아이들이 박을 터뜨릴 때 쓰는 콩주머니나 텐트를 만들었다.

우리들은 1년 365일 늘 같은 파랑 추리닝을 입었다. 신기하게도 매일 똑같은 것을 먹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하루를 살다 보면 시간개념이 흐릿해졌다. 지나간 사건은 기억이 났지만 그게 어느 계절이었는지, 몇 월이었는지는 잘 기억에 남지 않았다. 하루는 사라진 아이가 우리에게 먹을 걸 던져주고 달아났다. 쥐도 새도 모르게 복지원을 탈출했던 은희가 형제원 담벼락에 갑자기 나타났다. 열살쯤 됐으려나, 그 애가 어떤 경로로 뒷동산에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아마 복지원을 둘러싼 산을 타고 왔을 것이다. 흰 블라우스에 치마를 입은 은희는 복지원 담벼락 너머에서 초코파이가 가득 담긴 봉지를 던졌다.

“배고프재? 너거 먹어라!”

은희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한 편의 영화 같은 것이어서 초코파이라면 환장하는 아이들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만 봤다. 정신을 차리고는 떨어진 초코파이를 줍느라 정신없었지만. 복지원 경비원들이 화들짝 놀라 달려갔다. 누구도 날쌘 은희를 잡지는 못했다. 그 아이가 어떤 경로로 복지원에 나타났다 사라졌는지는 지금도 모를 일이다.

굶주림은 사람을 동물로 만들었다. 낮은 비루했고 밤은 악랄했다. 남자들은 성욕에 굶주렸다. 수천명의 수용자들은 남자와 여자로 구별됐다. 멀리서 지켜만 볼 뿐 서로 이야기는 나눌 수 없었다. 유일하게 여자들을 가까이서 대할 수 있는 곳은 복지원 내부의 국민학교 분교와 야간중학교, 식당이었다.

성에 굶주린 소대장들은 밤이 되면 아이들이 누운 침대 위에 기어 올라가 팬티를 벗기고 성기를 끄집어내어 엉덩이에 밀쳐넣었다. 화장실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밤에 일을 치른 아이들은 낮이 되면 제대로 걷지 못하고 절룩거렸다. ‘후장 따였다.’ 복지원 사람들은 그렇게들 표현했다. 아침에 누군가 절뚝거리면 후장을 따였다는 걸 알면서도 서로 묻지 않았다. 그저 짐짓 모르는 체 넘어가는 게 편했다. 후장 따인 엉덩이 밖으로 괄약근이 삐져나왔고 며칠이 지나도록 쉽게 낫지 않았다. 태길은 우연히 잠에서 깨어 옆 침대에서 후장이 따이는 걸 보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번 복지원 꼭대기의 새마음교회에서는 인민재판이 열렸다. 재판장도 검사도 원장 박인근이다. 공정할 수 없었다. 후장을 따인 아이가 어른을 유혹한 죄를 뒤집어쓰고 고백하기도 했다. 소대장에게서 후장을 따인 어떤 아이는 중대장에게 신고했다가 뺨을 얻어맞았다. 짱구 소대장, 개눈깔 소대장은 아이들 엉덩이에 성기를 집어넣는 것으로 유명했다.

배고픔은 우리를 비굴하게 했다. 박인근 원장의 아들은 이따금 사택 창문 밖으로 라면 수프(스프)나 십원짜리를 던지는 장난을 쳤다. 그 아이는 수프 하나를 받으려고 날뛰는 원생들을 관찰했다. 간혹 사택 1층 문 앞에서 수프를 던져놓고 급하게 문을 잠갔다. 아이들은 떨어지는 수프를 잡아채려다 부딪치고 뒤엉켰다. 수프가 던져지면 배고픈 우리는 자동적으로 먹기 위해 뛰어올랐고 서로 가지려고 싸워야 했다. 하늘에서 라면 수프가 내릴 때마다 태길도 두 발을 들어 뛰어올라 잡아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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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 2014.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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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 제1회 ① 푸른 창문




등장 인물


선옥이 떠난 거리에서…태길은 다시 길 잃은 개가 되었다

▶ 1984~1987년, 형제복지원에 갇힌 박태길의 삶을 전합니다. 3년의 시간은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었고 그가 사는 오늘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것입니다. 형제복지원은 파문을 일으키며 세간에 알려졌다 잊혀지기를 반복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복지원에 갇혔던 수만명의 인생과 기억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습니다. 박태길씨는 현재 부산 참다움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기사는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취재와 자료 수집을 통해 쓰여졌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mayseoul@naver.com

쇠창살 밖으로 검은 하늘에 흰 달이 걸려 있다. 희미하게 달빛을 받은 캄캄한 쇠창살 안에는 칼로 자른 듯 엄격하게 줄지은 2층침대마다 아이들이 반듯하게 누워 있다. 낮의 노동과 잔혹한 질서를 잊고 80명의 아이들은 허공을 향해 눈을 감았다. 방문은 바깥에서만 열 수 있는 이중 잠금장치로 막혔고 쇠창살이 창문을 빽빽하게 감쌌다. 누구도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다. 평화롭진 않지만 안전한 시간, 폭력과 욕망 착취마저 잠 드는 시간에도 이 공간은 통제돼 있다.

모두 잠이 들어버린 시간에 열다섯살 태길은 홀로 깨어 있다. 이곳 복지원의 원생들은 길거리를 다니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차에 태워져 잡혀오거나 가족들이 위탁해 맡겨졌다. 가족이 있든 없든 복지원은 평등하며 불평등하다. 원생들은 모두 푸른색 운동복과 실내화를 신고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짧은 커트 머리를 했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같은 식판에 같은 음식을 담아 먹었고 같은 교육을 받고 노동했으며 똑같은 취침 시간이 주어졌다. 복지원 원장 밑으로 중대장, 소대장, 조장으로 이어지는 구조에서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원생은 가장 밑바닥 계층이다.

이 거대한 감옥을 지키는 관리자들 또한 처음에는 복지원에 붙들려 왔다가 도망치지 않게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복지원 입구의 높고 단단한 철문을 지키는 경비원, 원장의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알아차리는 충직한 중대장, 중대장의 아래에서 탈출하지 못하게 원생들을 때리는 소대장, 그리고 소대장 밑에서 청소를 하거나 물을 긷고 소대장 흉내를 내는 조장들은 24시간 원생들을 통제한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복지원은 철공소, 식당, 병동, 교회, 목욕탕, 학교, 작업장 같은 시설이 모두 갖춰진 작은 사회다.

태길은 수천명의 원생 가운데 남자 아동 소대의 소대장 김충식을 돕는 조장이다. 그 또한 처음부터 야만적인 질서를 만드는 요원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창살 밖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 꿈꾸지 않는다기보다 헛된 희망 같은 건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집어넣고 꺼내지 않고 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탈출 시도는 번번이 좌절됐고 희망의 대가는 잔혹했다.

소대장 충식의 충직한 부하가 되기 두어달 전, 태길은 탈출을 시도했다가 형제원 원장 박인근한테 죽도록 얻어터졌다. 탈출을 시도한 그날, 이곳 관리자의 말을 믿은 게 잘못이었다. 태길과 복지원 야간중학교 1학년 친구들 다섯명은 몰래 철공소에 들어가 연장을 훔쳤다. 탈출하기 위해 도구가 필요했다. 태길과 아이들은 형제원 담장을 넘으면 갈아입을 사복과 신발도 챙겼다. 그 시간, 야간중학교 1학년 학생들을 빼고는 모두들 복지원 내부의 교회에서 저녁 6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희망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적어도 ‘얼빵한’ 한 놈이 자기 키만한 쇠막대를 들고 철공소를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아이들이 철공소를 나왔을 즈음 때마침 멀리서 다가오는 철공소 반장과 눈이 마주쳤다.

반장은 철공소와 떨어진 곳에서 태길 쪽을 주시하며 명령했다. “이번 일은 없는 일로 할 테니 가지고 있는 거 다 내려놓고 손들어.” 태길과 아이들은 가방 안에서 연장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반장의 눈빛 신호를 받은 철공소 저 아래의 경비원들이 달려와 아이들을 순식간에 잡아챘다.

태길은 수천명 원생 가운데 
소대장 김충식을 돕는 조장이다 
조장의 임무는 간단하다 
소대장한테 못 기어오르도록 
때리거나 기합을 주는 일이다

어둠 속에서 곰이 머리를 숙였다 
“한번만 봐주세요, 도망치게요” 
태길은 이상한 대답을 해버렸다 
“그래?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곰은 순식간에 환풍기 속으로…

아이들은 복지원 꼭대기에 있는 새마음교회로 끌려갔다. 예배당 앞쪽에서는 수요일 저녁 예배가 진행되었고 태길과 아이들은 뒤쪽에 꿇어앉았다. 박인근 원장이 태길 앞에 나타났다. 원장이 바지 주머니에서 검은색 가죽장갑을 천천히 꺼내 장갑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복서의 전조였다. 복지원의 링 위에서는 심판이나 규칙, 경쟁자가 없었다. 승리자는 언제나 원장 박인근이다. 예배당에 꿇어앉은 태길과 아이들은 박인근이 날리는 주먹과 발차기를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태길과 아이들은 바닥에 쓰러졌다. 원장의 주먹과 발이 아이들의 머리나 가슴팍에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나긋나긋한 임영수 목사의 설교가 들렸다.

찬송가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태길은 정신을 잃어갔다. 자비와 용서, 회개의 설교가 예배당 앞쪽에서, 학대와 응징이 예배당의 뒤쪽에서 벌어졌다. 목사를 향해 앉은 원생들은 등 뒤에서 구타 소리가 들렸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공포스러운 순간에 고개를 돌려 똑바로 응시하는 것은 복지원에서 위험한 일이었다. 모른 척하거나 외면하는 일은 안전했다.

태길과 아이들은 근신 소대에 끌려갔다. 태길처럼 도망을 치려 했거나 복지원의 질서에 반항한 자들이 소집된 곳이다. 어른 원생들은 식사와 취침 시간을 빼곤 미용실, 목공소, 포클레인, 가구, 나전칠기, 미장, 용접, 선반, 뜨개질, 봉제실에서 일을 했다. 철문 밖에서 트럭이 들어와 복지원 안에서 생산한 물건을 싣고 갔다. 그러나 이 물건을 만든 원생들은 월급을 받지 못했다. 어린이나 청소년은 주로 작업에서 배제됐지만 도망치다 걸리면 그때부터 개고생이 시작됐다.

태길은 근신 소대에 배정된 날부터 온종일 커다란 돌을 깨고 손바닥 위에 놓으면 훅 날아오를 만큼 부수었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돌을 깨는 일은 성인 남성에게도 힘에 부쳤다. 밥을 먹으려고 숟가락을 들면 손이 덜덜 떨렸다. 쉬고 싶을 때에도 등 뒤에서 소대장들이 감시를 했다. 연장은 부실하고 조악했으며 돌은 단단했다. 태길처럼 탈출에 실패한 어른들은 쌀포대를 뒤집어쓰고 식당 앞에 서 있는 벌을 받았다. ‘나는 도망치다 붙잡혔습니다.’ 이렇게 쓰인 쌀포대를 입고서 식당 앞에 서 있으면 원생 수천명이 식사 시간마다 지나쳐 갔다. 탈출 실패자들은 화장실마다 똥을 푸러 다녔다.

한달간의 혹독한 교화 작업을 끝내고 태길은 남자 아동이 사는 27소대에 배정을 받았다. 군인들처럼 각을 잡고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이는 제식훈련을 하던 태길을 소대장 김충식은 눈여겨봤다. 소대장 충식은 태길을 조장으로 발탁했고 태길은 거절하지 않았다. 완장을 찬 태길은 달라졌다. 소대장들의 상징인 각 잡힌 야구모자와 팔에 끼는 토시, 몽둥이는 없었지만 아이들에게 기합을 주거나 괴롭혔다. 소대장 충식이 두드려 팬 꼬맹이들의 얼굴에서 피를 닦으며 뒤처리를 했다. 태길은 소대장 충식의 충직한 동료이자 하수인이 되었다. 소대장 충식은 악독하기로 유명했지만 조장 태길에게는 관대했다.

태길이 오늘 밤, 홀로 깨어 있는 것도 도망치려는 아이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물론 태길 혼자 밤을 새우는 건 아니다. 원생들은 1시간에 한번씩 교대를 바꾸며 탈출자들을 서로 감시했다. 밤교대 근무자는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다. 소대장이 매일마다 그날의 야간 근무자를 지정했다. 그날도 태길에겐 특별할 것 없는 지루한 근무였다. 적어도 ‘곰’ 녀석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밤 열두시쯤 됐으려나. 아니, 새벽 한시였는지도 모르겠다. 느려터진 행동으로 사람 답답하게 만들던 곰 녀석이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를 쳐들었다. 이 밤에 깨어나는 아이들은 변기에 똥을 싸거나 오줌을 갈기러 가는 것 외에 별다른 일이 없다. 한데 녀석이 변기가 아닌 태길에게 다가왔다. “한번만 봐주세요.” 녀석이 태길에게 다가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얼굴을 하고 덥석 사정을 한다. 곰은 태길보다 두세살 어렸다. 정확한 나이나 이름은 몰랐다. 어차피 친해져 봤자 이 소대에서 저 소대로 끊임없이 옮겨지며 헤어질 사이. 게다가 서로를 감시해야 했기에 우정이라는 것이 복지원에서 깊게 자라날 일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곰이 머리를 조아리며 태길에게 속삭였다.

“한번만 봐주세요.”

“뭘 봐줘? 말해봐라.”

“도망치려고요.”

태길은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일반 원생도 아닌 조장에게 도망을 갈 테니 봐달라고 말하는 겁대가리 없는 행동이라니. 곰 같은 녀석이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태길은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대답을 해버렸다.

“그래?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만에 하나 곰이 도망친다면 탈출을 방조한 태길도 무사할 수 없었다. 그날 밤 태길이 왜 그렇게 쉽게 승낙을 했는지 스스로 설명이 안 됐다. 늘 탈출을 꿈꾸고 도모하던 사람들도 이곳에 순응하고 관리자로 변모하지 않았던가. 사실 곰 같은 미련한 녀석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복도로 향하는 이중 잠금은 어떻게 뚫을 것이며, 창에는 쇠창살이 있어 나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이 방에 소대장 충식이 같이 누워 자고 있었다. 어쩌면 충식이 이불 속에서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을 거란 생각에 오싹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태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곰은 유령처럼 소대장 책상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고 뭔가를 꺼냈다. 드라이버였다. 바보 같은 곰은 소대장 책상에 드라이버가 있다는 사실을, 태길도 몰랐던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곰이 살금살금 환풍기로 걸어가 드라이버를 갖다댔다. 툭, 환풍기가 뜯겨 나가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태길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소대장 충식이 깬다면 모두 살아남기 어려웠다. 소대장 충식을 보니 아직은 미동이 없었다.

그때야 어둠 속에서 다른 아이들 셋이 이불 밖으로 머리를 쳐들었다. 곰과 같이 탈출하려고 약속했던 아이들은 태길과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태길이 허락하면 환풍기 밖으로 도망칠 것이고 태길이 곰을 작살내면 잠을 자는 척, 모른 척 하려고 했다. 바보 같은 곰은 아이들을 대표해 그 모든 위험 부담을 졌을 것이다.

쉽게 뜯어진 환풍기 사이로 밤의 공기가 밀려들었다. 곰이 환풍기로 머리를 집어넣더니 허리가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곰이 환풍기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이 지옥 같은 감옥을, 곰은 간단한 드라이버 하나로 뚫고 도망쳐버렸다. 나머지 아이들 셋도 차례차례 환풍구 사이로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태길은 허망하게 뜯어진 환풍구를 바라봤다. 탈출을 연료 삼아 태웠던 의지가 지난번 실패로 사그라지고 소대장 충식의 충직한 동료로 살던 태길에게 쉽게 뚫린 환풍구는 자극을 주었다.

태길도 환풍기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어깨를 대었다. 열다섯 태길이 나가기엔 너무 작은 크기다. 태길은 뜯긴 환풍기를 대충 걸쳐놓고 다음 당번을 예정 시간보다 10분 일찍 깨웠다. 곰과 약속을 했던 것인지 우연히 환풍기를 목격한 것인지 다음 당번도 침대에서 일어나 구멍 사이로 사라졌다. 태길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이불 위에 너부러져 뒤척이다 코를 고는 척 드르렁거렸다. 태연한 척 노력했지만 심장을 방망이질하는 소리만은 진실했다.

20분쯤 지났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대장 충식의 또 다른 충직한 조장, ‘똥개’였다. 똥개는 환풍기를 보고 고함을 질렀다. 잠든 소대장이 일어나 상황을 파악하고 중대장을 불렀다. 한밤에 아이들은 모두 깨고 중대장은 27소대에 달려왔다. 심문이 시작됐다. 곰과 아이들이 빠져나가는 걸 본 사람은 없느냐, 탈출 낌새는 없었느냐. 태길은 졸린 눈으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잡아뗐다. 소대장 충식은 태길에게 더는 따지지 않았다. 태길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그날 밤이 새도록 기합을 받았다. 곰과 아이들을 창살 밖으로 내보낸 후회는 들지 않았다. 아이들을 때릴 때 저버렸던 미안함과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1985년 어느 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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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 2014.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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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였다"…형제복지원 생존자들 '눈물의 증언'

책임 회피하는 안전행정부…국가의 책임은 없다?



국회 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이 눈물 바다가 됐다. 상상을 초월하는 인권 유린이 발생했던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생존자들이 8일 국회에서 증언에 나섰다. 

1987년에 세상에 알려진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년 박정희 정권의 내무부(현 안전행정부) 훈령 410호를 통해 국가 차원의 '인간 청소' 정책에서 시작됐다. 이후 1980년 쿠데타를 통해 불법으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이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앞두고 이를 적극 활용했다. 시민단체는 이를 '인간쓰레기로 분류된 인간'에 대한 '사회정화'의 명목으로 행해진 국가 차원의 폭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프레시안>에 연재된 '26년, 형제복지원' 기사 바로가기)

형제복지원 설립자의 사위였던 박인근 씨는 1960년대부터 형제복지원 운영에 관여했고, 1965년 7월 부산시로부터 아동 복지 시설 인가를 따내 국가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내무부 훈령이 제정되면서 정부는 공무원, 경찰 등을 동원, 신원불분명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여 형제복지원에 보냈다. 

형제복지원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오래 전이지만,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지난달 24일 새정치연합 진선미 의원은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과 보상 책임을 담은 특별법을 발의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안전행정위가 아니라 보건복지위 소관으로 배정됐다. 당시 내무부 등이 관여했던 정황 등에 비춰보면 이 사건은 국가 폭력이자 '국가적 인신매매'로 볼 수 있지만, 안행부가 이 사건을 복지부 소관으로 떠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복지부 소관이 되면 배상 등과 관련해 '복지 시설에 의한 피해 문제'로 축소될 수 있다.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모임(한종선, 박태길 공동대표)은 8일 오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 차원에서 벌어진 과거사 사건을 책임지지 않겠다는 무책임한 태도는 힘겹게 살아남은 피해 생존자를 두 번 죽이는 것이며, 의문의 죽임을 당한 넋들의 영혼까지 짓밟는 행위"라며 "안전행정부는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형제복지원의 후손, 박인근 씨 일가가 운영하는 부산 '실로암의 집'에는 형제복지원 시절 강제 노역의 실상이 담긴 사진이 아직도 버젓이 걸려 있다. ⓒ여준민

▲형제복지원의 후손, 박인근 씨 일가가 운영하는 부산 '실로암의 집'에는 형제복지원 시절 강제 노역의 실상이 담긴 사진이 아직도 버젓이 걸려 있다. ⓒ여준민



"형제복지원 지옥 8년, 탈출해보니 집까지 5정거장이더라"

형제복지원 피해자는 약 3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그 유가족들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그 중 200여 명이 현재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현재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당시 벌어졌던 일에 대한 증언은 일부 나와 있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 벌어졌던 형제복지원의 실태에 대한 증언은 많지 않은 상황이다. 이날 형제복지원 피해자 증언대회에 참석한 피해자 김희곤 씨는 1970년대 형제복지원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김 씨는 1970년 국민학생(초등학생) 시절 부산 서면에 있는 집 근처에서 놀다가 형제복지원에 끌려가 폭행과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국가가 장려한 '폭행'의 희생자였던 셈이다. 김 씨는 SBS <그것이 알고싶다> 형제복지원의 진실 편을 본 후 용기를 내 형제복지원 피해자 유가족 모임(한종선 대표)에 연락을 해 왔다고 밝혔다. 

"저는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70년부터 형제복지원에서 나올 때까지인 1978년 3월까지 있었다. 들어가기 전, 부산 서면의 집 근처에서 놀고 있는데 끌려갔다. '왜 내가 잡혀가야 하나. 나는 부모도 있고 5남매의 장남이다'라고 말했지만 그럴 때마다 구타를 당했고, 구둣발로 얼굴을 차여 이빨, 코가 다 부러졌다." 

김 씨는 박정희 정권 시절, 형제복지원의 운영 실태에 대해 상세히 증언했다. 김 씨의 말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은 원생들에게 낚시나 건설 등 강제 노역을 시켰다. 낚시에 동원되지 않은 원생들은 산을 깎아 다지고, 건물 만드는 일을 했는데 그들은 '개척자'로 불렸다고 한다. 형제복지원은 원생들을 그룹으로 나누어 '1차 개척자', '2차 개척자' 등으로 명명했다.

"저는 2차 개척자로 떠나게 됐다. 1차 개척자 24명 정도 있었고, 2차 개척자가 한 40명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산을 깎고 부로크(벽돌)를 찍고 그런 일을 했다. 산이 있으면 그 밑을 깎아 1미터 정도 굴을 판 후, 굴 위로 올라가 파이프를 박아서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산을 깎았다.(울음) 위에서 흙을 무너뜨리면 아래에서 작업하다가 튀어나오는데, 곡괭이, 삽을 놓고 나오면 다시 가져오라고 해서 들어갔다가 흙더미에 깔리는 사고가 빈번했다. 천막에서 살면서 산을 개간해 평지를 만들어 집을 지었다. 그곳에서 8년 넘게 있으면서 속옷, 양말 하나 배급 받은 기억이 없다. 밥은 쌀 한 톨 없는 보리밥에, 물에 된장을 풀어서 줬다. 일을 안 하면 밥을 안 줬기 때문에, 일을 하고 밤에 두드려 맞았다. 다음날 밥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그 몸을 끌고 일을 하러 갔다."

가해자들은 원생들을 내무반 형태의 수용 시설에 빼곡하게 집어넣었다. 군대식이었다. 원생들의 머리 쪽에 다른 원생의 다리가 오도록 해 '지그재그' 방식으로 '칼잠'을 재웠다. 이른바 '소대장'(관리자)들은 "몸을 밟고 지나갈 때 발이 빠지면 죽을 줄 알으라"고 엄포를 놓았다. 얼마나 빼곡하게 원생들을 눕혔는지, 밤에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면 자리가 없어질 정도라고 했다. 

세면시설도 없어 바닷가에서 씻었다. 낚시 작업을 하는 어린 아이들이 낚싯바늘을 다루다 손가락을 찔려도 치료를 받지 못했다. "낚싯바늘에 찔린 자리에 고름이 질질 새는데, 바닷물에 고름을 씻고 상처를 씻었다"고 했다. 

김 씨는 "제가 있을 때 구타로 죽은 사건이 많았는데, 기억하는 이름이 송기훈이라는 친구였다. 구타를 당하고 아침에 자다가 일어나 집합 장소로 가던 중 쓰러져 죽었다.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이름을 모른다"고 했다. 김 씨는 "그중에 부자지간에 끌려온 사람이 있었는데 아들이 맞아 죽어서 아버지가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그는 "3소대에 공 씨라는 사람이 죽게 됐다. 그 사람이 죽으니까 그 사람 관물함에 있는 그 누더기 옷을, 입소자들이 하나라도 챙기려고 싸웠다. 지옥보다도 더 그런 세계였다"고 증언했다. 

"제가 있을 때 1소대부터 8소대까지 운동장부터 건물을 다 지었다. 1978년에 가족들이 찾아와서 그해 3월 6일 나가게 되는데, 원장이 내가 돈 벌은 것이라며 4만2000원을 저희 가족들에게 줬다. 제가 어린 시절 청춘을 다 뺏기고, 청소년기를 그 곳에서 말살당했는데, 돈 4만2000원을 주면서 가라고 합디다. 집이 부암동이고 국민학교 4학년 다니는 아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구타로 돌아왔다. 1978년 3월 6일, 형제복지원에서 나왔는데, 거기에서 다섯 정거장만 가면 제 집이더라. 다섯 정거장. 거기까지 가는데, 9년이 걸렸다. 집에 갔더니 아버지가 1976년에 돌아가셨다. 저를 찾으러 전국 방방곡곡에 다니다가 돌아가셨다. 집 옆에 있는 저를 찾지도 못하고 돌아가시니 저는 천하의 불효 자식이 돼 있었다. 저 혼자 평생 살았다. 제 나이 55세, 가족, 사람 이런 거 모른다. 왜 제가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을 안아야 하는지 국가를 많이 원망했다."

김 씨는 현재 기초생활자다. 억울함을 토로하려고 해도, 끌려갈까 봐 두려워 못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어린 시절 당했던 구타에 온몸이 성치 않은 상황이다. 김 씨는 "국가에 대한 이야기는 못 배워서 무식해서 할 수는 없지만, 과연 우리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나는 부랑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철거된, 형제복지원의 과거 모습 ⓒ연합뉴스

▲지금은 철거된, 형제복지원의 과거 모습 ⓒ연합뉴스



"나는 인간이 아니라 개였다"

이날 증언대회에 나온 최승우 씨는 1982년 입소해 1986년까지 형제복지원에서 생활했다. 그는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부산 서면에 살았고, 당시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부모님이 따로 살아 할머니 밑에서 살았다. 그는 공부밖에 모르는 학생이었다. 그가 학교에서 급식으로 빵과 우유를 받아온 어느 날, 한 순경이 최 씨를 붙잡고 가방 검사를 했다. 순경은 "훔친 것 아니냐"고 질문했고 최 씨는 "훔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순경은 어디론가 전화를 했고, 잠시 후 형제복지원이라는 이름이 적힌 차량이 한대 왔다. 그 차에서 나온 사람들은 순경이랑 몇 마디 대화를 한 후 최 씨를 강제로 끌고 갔다. 거기에서 최 씨는 형제복지원을 만났다. 

"그날 이후로 저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하다. 어떻게 그곳에서 그렇게 살았는지. 신입 소대에 들어가자마자 모든 옷가지를 다 벗겨냈다. 소대장이라는 사람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몸이 아파 쓰러졌는데도 두드려 패더라. 그때 어린 나이에 나는 죽고 싶다는 마음 밖에 없었다. 그 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오만 악행들이 다 있었다. 기합 주고, 몽둥이로 때리고, 조금 예쁘장하면 끌고가서 성폭행한다. 그때 산에 돌아다니면서, 오래 있던 원생들이 "산에 시체가 있다. 그 시체에서 인이 나온다"고 했다. 인이 몸에 좋다고 해서 그 인을 먹었다. 그렇게 살았다.  

그곳만 생각하면 정말 미칠 것 같다. 정말 나는 개였다. 음식을 주는데 너무 냄새가 역겨워 먹지를 못해 오바이트(구토)를 했다. 그것을 보고 중대장이 몽둥이를 들고 와 때렸다. 맞으면서 다시 먹다가 또 오바이트를 했다. 때리니까 맞고 또 그것을 먹었다. 오바이트 하고 또 그것을 먹고…. 나는 인간 이하로 살아왔다." 

형제복지원 생존자인 한종훈 씨는 "동생과 함께 형제복지원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동생은 현재 사고가 나서 지적장애를 겪고 있다. 우리를 찾던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인해 현재 치매를 앓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 이후로 저희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정부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밝혀줘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박세열 기자


기사원문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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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선씨는 잘 웃었다. 형제복지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웃었고, 사진 촬영을 하면서도 웃었다. “마음이 아프다고 오만상을 써가면서 이야기하면 아무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 얘기 잘 믿어주지도 않을 테니, 이왕 얘기하는 거 듣고 싶게, 재미있게 하자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한씨 속에 있는 상처투성이의 여덟살 꼬마는 간절하게 말한다. ‘들어주세요, 우리 얘기 들어주세요, 어두운 곳에 갇혀 있는 우리를 봐주세요.’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토요판/커버스토리]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씨 인터뷰

형제복지원 사건 생존자 한종선
26년만에 국가의 책임을 묻는다

▶ 한종선씨는 올해 대전, 부산, 전라도 등 전국을 다녔습니다. 언론을 통해 형제복지원 사건을 듣고 연락 온 피해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날 때마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 있구나. 나 혼자만 살아남은 게 아니구나’ 싶어서요. 그는 오늘도 대책위(02-794-0395)에서 피해자들을 기다립니다. 작은 후원으로도 대책위를 도울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752602-04-194222/여준민·형제복지원)

‘너무 오래된 사건을 가지고 나와 죄송합니다.’

2012년 5월께 한종선(37)씨는 직접 쓴 손팻말을 들고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섰다. 25년 전 자신이 겪은 부산 형제복지원 인권침해의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 전부터 국가인권위원회, 언론사, 인권단체 등의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오는 말은 ‘공소시효가 끝났다’였다. 고민하던 한씨는 결국 스스로 말하기 시작했다.

형제복지원은 1987년 당시 3164명을 수용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아 시설이었다. 불법감금·폭행·강제노역 등 인권침해로 그때까지 12년간 51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건 원장이었던 박인근씨가 불법감금과 국가보조금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1987년 1월. 그러나 비슷한 시기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달리, 반짝 주목받고 사라졌다. 경찰과 검찰은 형제복지원 인권침해를 수사하지 않았고, 법원은 박 원장의 형량을 계속 줄여줬다. 같은 해 6월30일 복지원 폐쇄로 뿔뿔이 흩어진 피해자들은 ‘부랑자’라는 낙인과 공포의 기억 속에 입을 닫았다.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씨가 다시 말하기 전까지 아무도 이 사건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작은누나는 형제복지원에서 병을 얻어 지금까지 정신병원에 있다. 자신은 세번 감옥살이를 했다. 그 뒤 일하다 허리를 다쳐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가족의 불행을 아버지와 운명 탓으로 돌렸던 그는 이제 그 책임을 형제복지원과 국가에 묻고 있다.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지난달 27일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이 사건과 관련한 첫 대책위다. “26년 전 사건을 왜 이제 다시 말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한씨는 반문한다. “왜 26년이나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느냐”고.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8살 때인 1984년 10월16일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다. 그전에는 어떻게 살았나?

“아버지와 큰누나, 작은누나 넷이서 부산에서 살았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없다. 아버지는 구두를 닦았다. 집 근처에 부산역, 용두산공원, 영도다리, 자갈치시장이 있었다. 학교 끝나면 작은누나랑 만날 놀러 갔다. 누나는 꽃반지 만들고 나는 지렁이 잡고…. 유일하게 내게 남은 따뜻한 추억이다.”

-형제복지원에 어떻게 갔나?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간식과 옷을 사주고 이소룡이 나오는 영화도 보여줬다. 웬일인가 싶어 마냥 좋아했다. 그러고는 나와 작은누나를 파출소로 데려가서 기다리라고 하고 나갔는데, 웬 검은색 지프 같은 차가 와서 우리를 실어 갔다.”

톰 크루즈가 말했다, 꿈만 꾸면 계속 인질이 된다고

형제복지원의 뿌리는 박인근(83) 원장이 1960년 설립한 ‘형제육아원’이다. 1979년 법인 명칭을 바꾼 뒤, 전국 최대 부랑아 시설로 성장했다. 그 배경에는 박정희 정권의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 지침’인 1975년 12월15일자 내무부 훈령 410호와 복지국가 건설, 사회정의 구현을 내세운 전두환 정권의 ‘부랑인 정화 사업’이 있었다. 전자에 따라 경찰과 지방자치단체가 합동으로 부랑인 단속·강제 구금을 시작했고, 후자는 이를 더 강화시켰다.

도시 미관, 범죄 예방이란 명목으로 부랑인들은 국가권력에 의해 각종 시설에 강제 수용됐다. 1987년 2월4일 발표된 ‘신민당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1986년 형제복지원 수용자 3975명 중 경찰이 수용 의뢰한 사람이 3117명이었다. 당시 경찰 내부 근무 평점이 구류자 1명당 2~3점이지만 형제원 입소는 1명당 5점이었던 시절이었다. 밖에서 놀고 있다가, 퇴근하다가, 차가 끊겨서 부산역 대합실에 있다가, 가출했다가 다짜고짜 잡혀온 피해자들의 증언이 잇따랐다.

한종선씨(가운데)의 아버지(왼쪽)와 작은누나는 경북 구미의 한 정신병원에 있다. 엄마처럼 한씨를 돌봤던 작은누나는 ‘내 동생은 여덟살인데’ 하며 한씨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 세 사람이 가족이란 사실을 아는 건 한씨뿐이다. 올해 병원에서 찍은 이 사진이 그가 가진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한종선씨 제공

내내 구타와 기합의 기억…12년간 사망자 513명

-이상한 느낌이 들었나?

“차에 태우려고 하니까 작은누나(당시 11살)가 ‘집에 갈 거다’라며 울었고 나도 덩달아 울다가 맞았다. 충격에 정신 줄을 놓은 채 주위를 둘러보니 나와 비슷한 아이들이 있었다. 복지원에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었는데, 옷을 팬티까지 다 벗으라더니 신체검사를 했다.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는데, 우리를 불러 소대로 데려갔다.”

형제복지원은 군대식 조직이었다. 수용자들은 1~28소대에 분산 수용돼 집단생활을 했다. 소대마다 소대장 1명, 총무 1명, 조장 4명씩이 있었는데 모두 수용자들이었다. 수용자는 모두 군인처럼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파란색 추리닝을 입고 지냈다. 아이들도 예외는 없었다. 3164명 중 1~18살의 아동은 915명이었고, 아동소대도 따로 있었다.

-소대로 가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누나와 같이 있어 위안이 됐는데, 누나는 23소대로 나는 24소대로 찢어졌다. 무서웠다. 그때까지 누나가 계속 옆에서 엄마처럼 지켜줬는데….”

-그곳의 일상은?

“매일 새벽 4시에 불침번이 ‘기상’ 하고 침대를 치면 일어난다. 이불 정리하고 4열 종대로 앉아 자체 점호를 한다. 탈출했나 안 했나 확인하는 거다. 점호 뒤 세면장 가서 4열 종대로 앉아 씻는다. 소금 받아 손가락으로 양치질을 하고 조장들이 물 세 바가지 부어주면 그걸로 입 헹구고 얼굴 씻고 바로 튀어나갔다. 10초도 안 걸렸다. 24소대가 많을 때는 123명, 적게는 84명이 있었는데 20~30분 안에 딱 끝난다. 씻고 나서 4열 종대로 있다가 중대장 원생이 오면 또 점호를 받는다. 점호가 끝나면 4시30분인데 아침 식사시간인 6시까지 한 시간 반 정도 운동장에 나가 군가나 찬송가를 부르며 뛴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같은.”

-식사는 어땠나?

“꽁보리밥, 전어젓, 깍두기, ‘똥국’이라고 불렀던 시래기 된장국이 매일 나왔다. 어쩌다 감자 부스러기나 고기는 없는 소고깃국이 나왔다. 조장은 식사시간 때마다 (밥을 빨리 먹는) ‘선착순 몇 명’을 외쳤다. 선착순 숫자는 조장 마음이다. 오늘은 왠지 타작하고 싶다고 하면 선착순 10명, 기분 좋으면 50명 할 때도 있다. 그 안에 안 들면 맞는 거다. 두들겨 맞지 않으려고 밥 세네숟갈 먹고 뛰어나간다. 아침, 점심, 저녁 다 그랬다. 식사시간에 안 맞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복지원에서 언제부터 맞았나?

“이틀째부터 맞았다. 나는 키가 작아 소대에서 1번이었다. 조장이 “번호”라고 말하면 1번이 맨 왼쪽에 서서 “1번”을 외쳐야 다음 사람이 2번, 3번 한다. 그걸 제대로 못해서 맞았다. 그때 나는 한글도 숫자도 잘 몰랐다. 복지원 안에 개금분교가 있었지만, 학교 다닌 기억보다 소대에서 맞은 기억이 더 많다. 한번 ‘줄빳다’ 맞으면 기본 5대씩 맞는다고 치면 된다. 소대 안에 있는 시간 내내 구타와 기합이 반복됐다. 24시간 중 깨어 있는 시간은 항상 맞았다.”

-누가, 왜 그렇게 때렸나?

“소대장이나 조장이 그랬다. 그들도 수용자였다. 자기들이 제대로 안 때리면 일반 소대원으로 강등될까봐 더 심하게 굴었다. 때리는 데 이유가 없다. 기상 1분 늦게 했다고 맞고, 제대로 안 서 있다고 맞고, 기분 나쁘다고 맞고…. 내가 있던 소대 중대장은 어른이었지만 조장은 열세살 정도밖에 안 됐다. 그 어린애들이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공간에서 사람을 마구 때리다 보면 이성을 잃기 십상이었다. 어리든 나이가 많든 상관없이 똑같이 맞았다. 24소대에는 여섯살 애도 있었고, 열살부터 있었던 27소대에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고등학생이 있었다. 이불에 싸서 때리는 이불 말이, 그냥 마구 때리는 타작, 물구나무서는 히로시마, 원산폭격 등 구타와 기합이 수도 없었다. 이성뿐 아니라 동성 간의 성폭행도 만연했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게 뭔지도 모르고 안에서 비일비재하니까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열한살이었던 작은누나와 
여덟살 때 형제복지원에 갔다 
깨어있는 시간 동안 계속 맞았고 
죽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살아남고 싶었다

작은누나는 점점 이상해졌고 
아버지마저 형제복지원에 수용 
1987년 6월 복지원 폐쇄로 
소식 끊긴 아버지·누나를 
20년 만에 정신병원에서 만났다

-그렇게 맞다 죽는 사람도 있었나?

“맞다가 병원에 실려간 뒤 돌아오지 않으면 죽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은 소대 총원에서도 슬그머니 사라진다. 그러나 죽음도 금세 잊을 수밖에 없었다. 복지원 안에서 죽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다음은 내 차례일 수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그래서 배고프면 벌레도 잡아먹고 흙을 쿠키처럼 딱딱하게 말려 먹기도 했다.”

신민당 진상조사단이 형제복지원 내부자료를 분석하니 1975~1986년 사망자가 513명이었다. 그중 한명이 1986년 8월 반항했다며 맞다 숨진 김계원씨다. 형제복지원은 그가 죽자 ‘신경쇠약으로 인한 신부전증’이라는 허위 사망진단서를 발급받고 매장했다. 수용자들은 “사체가 병원에 실험용으로 팔려간다”고 주장했다. 당시 언론은 형제복지원을 사설수용소군도, 아오지 탄광, 살상원이라고 불렀다.

지렁이가 꿈틀대지 않는 경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누나를 보는 게 제일 힘들었다. 누나는 만날 나를 보러 소대를 이탈했다가 두들겨 맞았다. 같은 소대에 있던 누나들 말로는 말 안 듣는다고 많이 맞고 성적 학대도 있었다고 했다. 누나는 점점 이상해졌다. ‘시간또라이’라는 정신분열 환자가 돼 정신이상자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손이 묶인 채 항상 누워 있었다.”

-저항하거나 도망치고 싶지 않았나?

“지렁이가 밟으면 왜 꿈틀대는지 아나? 확실하게 안 밟아서 그렇다. 완전히 죽을 정도로 확 밟으면 꿈틀댈 힘도 없다. 복지원에서의 폭력이 그랬다. 꿈틀댈 수 없을 정도로 밟아댔기 때문에 감히 덤빌 수가 없었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망갔다 잡혀오는 사람들이 반신불수 되는 걸 보고 꿈도 못 꿨다. 신고? 안에 갇혀 있는데 어떻게 하나. 유일한 희망은 아버지가 찾아와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왜 데리러 오지 않았나?

“아버지가 1986년 복지원에 왔다. ‘우리 데리고 나가려고 온 거야?’라고 들뜬 마음으로 물었는데 잡혀왔다고 하더라.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는데 도리어 잡혀 들어온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우리 가족을 박살낸 아버지를 다시 만나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한이 생겼다. 그렇게 복지원에서 마지막으로 본 뒤 아버지가 ‘좀 이상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용원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 검사(현 법무법인 한별 대표변호사)는 우연히 형제복지원의 강제노역 현장을 목격하고 수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은 거물이었다. 그는 1981년 4월 국민포장, 1985년 5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데다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이었다. 예상대로 수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박 원장 구속 다음날 부산시장이 ‘빨리 석방해야 한다’고 전화를 했다. 복지원 수용자 전원을 대상으로 구타 등 가혹행위, 강제노역 여부 등을 조사하러 울산 경찰관 30명을 보냈지만 부산지검 차장검사의 지시로 철수했다. 수사를 못하게 하니 내가 밝혀낼 수 있던 건 정부 보조금 횡령이었다. 그렇게 85~86년에 박 원장이 횡령한 11억4254만원을 찾아냈지만, 이마저도 검찰 상부의 지시로 6억8178만원으로 축소해야 했다.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데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형제복지원 사건이 동시에 터져 부담을 느꼈던 전두환 정권 차원에서 이 사건을 묻으려 했었다.” 김 변호사가 말했다.

그는 업무상 횡령, 특수 감금 등을 적용해 박인근 원장 등에게 징역 15년, 벌금 6억8178만원을 구형했다. 당시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원은 불법 감금 등을 인정하고, 징역 10년에 벌금 6억8178만원을 선고했다. 형량과 혐의는 계속 줄어들었다. 대구고등법원은 징역 4년, 벌금 없음을 선고했고 대법원은 이보다 낮은 2년6개월형을 확정했다. 게다가 대법원은 “법령에 근거한 정당한 직무수행”이라며 특수 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대법관 중의 한명이 헌법재판소 소장을 지낸 김용준 전 국무총리 후보자다.

2년간의 수사와 재판이 형제복지원의 실체를 밝히지 못한 사이, 1987년 6월30일 형제복지원은 폐쇄됐다. 수용자들은 무방비 상태로 사회로 나가거나 또 다른 시설로 옮겨가야 했다.

아들·동생 못 알아보는 아버지와 누나

-1987년 당시 안의 분위기는?

“경찰차가 왔다갔다하고 폐쇄된다는 소문이 드니까 ‘드디어 풀려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녀님들이 와서 내 이름을 부르더니 버스에 타라고 했다. ‘아버지랑 누나도 여기 있다’고 했는데 일단 타라고 했다. 그렇게 두 사람과 연락이 끊겼다. 버스를 타고 간 곳은 서울에 있는 ‘소년의 집’이었다. 밥도 배부르게 먹고 맞지도 않는 그곳은 천국이었다. 그런데도 스무번이 넘게 아버지와 누나를 찾겠다며 도망을 쳤다.”

-소년의 집에 언제까지 있었나?

“1992년쯤 나왔다. 열여섯살이 됐는데도 초등학교 졸업을 못하고 있으니 수녀님이 취업해서 아버지를 찾으라고 했다. 그래서 자격증 따고 경기도 성남에 있는 공장에 취업했다.”

-사회생활은 어땠나?

“소년의 집에서 같이 취업했던 애가 차털이하다 걸려 도망을 쳤다. 사장이 그때부터 ‘거기서 나온 애들은 다 똑같은 도둑놈’이라며 색안경을 끼고 손찌검을 했다. 마침 아는 형이 서울에 있는 구두공장을 소개해줘 그곳으로 옮겼다. 월급 35만원을 받고, 그중 30만원을 사장님 이름으로 된 통장에 넣었다. 그러다 1997년 외환위기 터지기 전에 가족을 찾으러 간다고 사장에게 그동안 모은 돈을 달라고 하니 ‘네 돈이 어딨어? 자꾸 여기서 이러면 파출소에 신고해서 복지원 같은 곳에 처넣으라고 한다’고 했다. 10만원 받고 나와서 빈 창고나 옥상에서 지내다가 돈 떨어질 때쯤 동네 불량배들을 알게 됐다. 불량배 생활을 하다 절도한 것 때문에 8개월, 1년, 1년6개월 세번 감옥에 갔다.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었지만 복지시설에 있다 갑자기 사회에 나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몰랐고, 사회도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원망이 컸을 것 같다.

“그래도 어긋나지 않고 정신 차린 건 네살 많은 큰누나 덕분이었다. 어렸을 때 친척집으로 간 큰누나를 1998년 다시 만났다. 큰누나가 세번째 감옥 갔을 때 면회를 왔는데 말도 없이 실망한 눈빛으로 나를 보기만 하더라. 그 눈빛을 보니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싶었다. 그때부터 ‘왜 내 인생은 이렇게 더럽게 꼬였을까? 우리 가족은 왜 이렇게 됐을까?’ 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운명 탓인가 싶어 관상학 공부도 했다. 그러다가 ‘형제복지원만 안 들어갔어도’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02년 출소 뒤에 어떻게 지냈나?

“닥치는 대로 일했다. 짜장면, 한식 배달도 하고 전단도 뿌리고, 봉투 공장에서도 일하고, 막노동도 뛰었다. 초등학교도 졸업 못했으니 이력서 내라는 곳에 취업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2007년쯤 미군 숙소 공사 현장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쳐 추간판탈출증 진단을 받았다. 산업재해 신청을 하려 했는데 근로복지공단 자문의사 소견은 산재가 아니라고 했다. 다른 병원 찾아다니며 진단서 떼다 돈이 떨어져 신청을 접었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아 인터넷 신문고에 글을 올렸더니, 전화가 와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라고 하더라. 그래서 주민센터에 신청하러 갔다 이미 기초생활수급자였던 아버지와 작은누나를 찾게 되었다.”

-1987년 헤어진 뒤 처음 만나는 건가?

“그렇다. 아버지는 울산, 작은누나는 부산에 있었다. 어렸을 때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정상적으로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다. 찾아가보니 정신병원이더라. 아버지와 누나는 복지원 폐쇄 뒤 노숙자가 돼 부산 시내를 떠돌다가 1989년부터 정신병원에 있었다고 했다.”

-20년 만에 봤는데 한번에 알아봤나?

“30대 후반의 건장한 아버지는 없고, 삐쩍 마르고 이빨도 한개밖에 없는 할아버지가 있더라. 그 모습을 보니 원망이 한순간에 훅 가라앉아 버렸다. 아버지는 ‘내 아들은 여덟살인데’ 하면서 나를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찰이 복지원에 아버지를 보냈던 것처럼, 또 자신을 어디론가 데려가려는 국가기관에서 보낸 감시자라고 생각한다. 배우 신은경을 닮았다고 생각했던 작은누나도 뚱뚱한 아줌마가 됐다. 누나는 못 알아볼 정도라, 만나자마자 발등의 화상부터 확인했다. 어렸을 때 내가 먹고 싶다던 ‘쪽자’(달고나)를 만들다 국자를 떨어뜨려 생긴 화상이었다. 누나도 어른이 된 나를 못 알아본다. ‘내 동생 선이’라고 했다가 오빠, 삼촌, 아저씨라고 했다가…. 두 사람도 서로 못 알아본다. 아버지와 누나의 시간은 오래전에 멈춰 있었다.”

“닥치는 대로 다 죽여버릴까 생각하기도”

-가족을 찾은 뒤 변화가 있었나?

“형제복지원 사건이 해결돼야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커졌다. 그간 틈틈이 복지원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박인근 원장은 겨우 2년6개월형 마치고 나와 또 복지시설 운영하며 돈도 많이 벌었다. 나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돼 전전긍긍하며 사는데 저 인간은 잘살더라. 너무 화가 났다. 사이코패스가 이렇게 생기는구나. 닥치는 대로 다 죽여버릴까 생각할 때도 있었다.”

박인근 원장은 1989년 7월20일 출소 뒤 다음해 부산시 북구청에서 중증장애인 시설 신축사업비를 받았다. 형제복지원은 폐쇄됐지만 법인 명의는 남아 재육원, 욥의 마을, 형제복지지원재단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현재 법인 기본재산 221억원의 형제복지지원재단은 2년 전부터 박 원장의 셋째 아들이 운영하고 있다. 이 재단은 지난해 유명세를 탔다. 부산시가 재단을 감사한 뒤 횡령이나 유용으로 의심되는 43억여원에 대해 검찰에 수사의뢰했기 때문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재단의 입장을 듣기 위해 연락을 취했으나 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선택을 했나?

“‘억’ 소리라도 한번 질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뿐 방법을 몰랐다. 그러다 지난해 5월쯤 텔레비전에서 <콜래트럴>이란 영화를 봤다. 암살자 톰 크루즈가 인질로 잡은 택시기사에게 꿈이 뭐였는지를 물었다. ‘리무진 택시 회사를 차리는 것’이라고 하니 톰이 ‘당신은 꿈만 꿨기 때문에 인질이 된 거야. 꿈을 이루려면 빚을 내서라도 리무진 택시를 구입했어야 했다’고 말하더라. 그 말을 듣고 ‘고민만 해서는 안 되겠구나’ 싶어 다음날부터 국회 앞에서 노숙하며 1인시위를 했다.”

-국회 앞에서 1인시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주목받긴 어렵다.

“내가 쓴 손팻말을 읽어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다 여름쯤인가 어떤 사람이 와서 손팻말을 읽더라. 내 얘길 듣더니 ‘1인시위는 오래 못 간다’며 ‘무기가 필요하다. 기억나는 대로 글을 써봐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하고만 살아서 믿음이 안 갔다. 교수이며 어디 대표라고 하는데 그렇게 보이지도 않았고. 그 사람은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였다. 교수님 보내고 저녁에 곰곰이 생각했다. 1인시위 해도 아무도 안 봐주니 적대감만 생기는데 글이라도 써보자 싶어 그날로 짐을 싸 집으로 돌아갔다.”

한종선씨의 수기에 전규찬 교수와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의 글이 보태져 2012년 11월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이 나왔다. 한씨의 이야기가 알려지자 탈시설정책위원회와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등을 중심으로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기 시작했다. 올해 1월31일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대책위 준비모임을 꾸려 피해자 찾기, 국가기록원 등을 통한 자료조사, 학술토론회 등의 활동을 진행했다. 그 결실이 지난달 20여개 시민단체가 모여 출범한 대책위다.

-대책위 출범까지 왜 26년이 걸렸을까?

“아무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대법관이 국무총리 후보가 될 만큼 관련자들이 아직도 건재하니 쉬쉬 됐던 거다. 인권단체들은 지금 막 터지는 사건을 막느라 이를 살펴볼 시간이 없었다. 피해자들은 말했다간 또 잡혀갈까 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까 봐, 다른 시설에 지금도 갇혀 있어서 나설 수 없었다. 편견도 컸다. 부랑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데려간다고 하니까 좋게만 생각했다.”

내 인생은 왜 꼬였을까 
우리 가족은 왜 이렇게 됐을까 
운명 탓하다가 그는 생각했다 
‘형제복지원에만 안 들어갔어도…’

영화 <콜래트럴>에서 암살자인 
톰 크루즈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꿈을 이루려면 빚을 내서라도 
리무진 택시를 구입했어야 했어” 
다음날 당장 국회 앞으로 갔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최종적으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데 우리 같은 약자를 시설에 강제로 데려가 가뒀다. 정부가 허가해주고 예산도 줬으면 시설이 제대로 운영되는지 관리·감독해야 했는데 그것도 안 하고 방치했다. 복지사회를 구현한다면서 우리를 인간이 아니라 배부른 개돼지처럼 대했다. 우리는 그 안에 갇혔지만 배고픈 인간이고 싶었는데, 상명하복 명령체계에서 말 안 들으면 개돼지처럼 때리게 뒀다.”

제발 이제는 내 가족을 돌려다오

대책위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박인근이라는 개인에 의한 범죄가 아닌 반헌법적인 국가정책에 의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범죄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강경선 대책위 공동대표(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는 “형제복지원은 정부가 운영비를 지원한 국가 위탁 시설이었다. 수용자를 데려다 준 것도 경찰이나 지방자치단체 등 국가기관이었다. 부산시는 감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며 비리를 눈감아줬다. 검사의 수사를 막은 것도, 최종 판결을 내린 것도 국가다. 따라서 형제복지원은 국가 범죄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시각에서 대책위는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국가의 배상책임, 피해자 의료비 지원 등의 내용을 담은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조사 및 피해자 배상에 관한 법률’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피해자 찾기, 학술대회, 자체 진상조사 등의 활동도 벌이고 있다.

인터뷰 중에 한씨는 반가운 문자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고3 시절에 강제 입소되어 1년여를 복지원에서 생활하다 그 당시 유일하게 탈출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뜻깊은 일을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한씨는 피해자모임 대표로서 대책위 활동을 하며 피해자를 찾고 있다. 지금까지 40명의 피해자와 3명의 실종자 가족과 연락이 닿았다.

-만나본 피해자들은 어떻게 지내나?

“안정된 삶을 사는 사람은 2~3명 정도다. 연락이 오면 찾아가서 만난다. 대책위 활동 소개하고 같이 하자고 하는데 대부분 걱정부터 한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을 또 빼앗길까 봐 여전히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그럼 ‘지켜봐 달라.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하고 헤어진다. 그때 기억이 너무 생생하게 떠올라서 괴롭다면서 밤에 술 마시다가 전화하는 사람도 있다.”

-증언하고 활동하면서 전보다 나아졌나?

“과거를 다시 떠올리는 걸 견디는 것에 익숙한 것뿐이지 치유 안 된다. 이야기한다고 치유될 것 같으면 세상에 아픈 사람 없다. 내 상처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어야만 나을 수 있다.”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형제복지원 사건 뒤 10년 지나 양지마을 사건(1998년), 또 10여년 지나 ‘도가니’(2006년 광주 인화학교 사건)가 터졌다. 형제복지원 사건 터지고 26년이 흘렀지만 변한 게 없다. 똑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다시는 우리 같은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복지시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을 해결하는 게 잘못 끼워진 단추를 처음부터 똑바로 맞춰 나가는 길이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가족을 이제라도 돌려줬으면 좋겠다. 병원에서는 이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 어차피 나을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셋이 같이 남의 눈치 안 보고 살 수 있게끔 시골에 빈집이라도 임대해주고 생활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한겨레 : http://www.hani.co.kr/arti/SERIES/381/6104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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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생존자


'한종선'님의 그림을 제가 다시 그려봤습니다~



책 <살아남은 아이>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1272156245&code=960201





87년 당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수사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 인터뷰


http://www.mbn.co.kr/pages/vod/programView.mbn?bcastSeqNo=1053379&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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